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가 1:9~11)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들고 집에 들어설 때, 좋은 점수가 아니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었는데, 그는 어느새 사랑을 '조건부로 받는 것'이라고 배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해야 인정받고, 예뻐야 사랑받고, 쓸모 있어야 필요한 존재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울다 지쳐 잠든 그를 어머니가 안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그냥 그렇게 안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희미하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잘나서 안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가서 1장에 등장하는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왕 앞에 설 만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탓에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고,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그녀는 "내가 검으나 아름답다"고 말하며, 자신의 검은 피부를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왕궁 안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넘쳤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그녀가 왕의 시선을 끌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말합니다. "내 사랑아." 그리고 이어서 그녀를 바로의 병거를 끄는 준마에 비유합니다. 고대 이집트 왕 바로의 전차를 끌던 말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이 보석과 장식으로 뒤덮인,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왕은 그 초라하고 검게 탄 여인을 향해, 바로 그 말처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뺨은 땋은 머리털로 아름답고, 목은 구슬 꿰미로 빛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여인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꾸밀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왕이 이미 아름답다고 했고, 왕이 직접 귀한 것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미 완전히 왕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인이 다음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왕의 말을 듣고도 몰래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이 검은 피부는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왕이 금 사슬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은팔찌를 사서 걸치며 조금 더 예뻐 보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우스꽝스러움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독생자 예수의 피로 "내 사랑아"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다 이루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거울 앞에 섭니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으며, 어딘가 부족한 자신을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 모든 분주함이 사실은 이미 주어진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고백이 된다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시편 131편은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를 묘사합니다.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갓난아기가 아니라, 젖을 뗀 아이입니다. 더 이상 젖을 먹지 않아도 되는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품이 좋아서,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낳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아이의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영혼을 평온하게 합니다. 반대로,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영혼은 흔들리고 불안해집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하나님 앞에 서면 늘 부족한 것 같아요. 기도도 더 해야 하고, 봉사도 더 해야 하고, 성경도 더 읽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이분은 지금 왕이 "내 사랑아"라고 불러 주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검은 피부를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와 봉사와 성경 읽기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주어진 사랑을 향한 불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불신이 영혼의 평온을 끊임없이 깨뜨리게 됩니다.
왕의 사랑은 여인의 모습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아름다워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 인간의 자기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무언가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결국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미 다 이루셨다고 하신 그 십자가를, 아직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이 남은 것처럼 취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사랑아." 이 한 마디가 가진 무게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검고, 초라하고, 왕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여인을 향해 왕이 먼저 다가와 부르는 이름,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주어진 이름, 그 이름 하나로 충분합니다.
더 꾸밀 것도, 더 증명할 것도 없습니다. 왕이 이미 아름답다고 했고, 왕이 직접 금 사슬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그 일방적인 사랑에 그냥 감동하는 것입니다. 젖 뗀 아이처럼, 어머니 품에 조용히 안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랑을 아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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