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가 1:5~8)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래에서 우리는 매일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이 어렵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사랑의 감정을 오래 붙잡아 두기가 어렵다는 뜻이지,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체로 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읽다 보면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진 얼굴, 오빠들의 명령으로 포도원에서 일하느라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돌보지 못한 삶입니다. 그녀는 왕의 사랑을 받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이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는 조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사랑과 전혀 다른 사랑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대개 조건을 따라 움직입니다. 더 예쁘고, 더 능력 있고, 더 매력적인 사람에게 마음이 향합니다. 설령 조건을 초월한 사랑이라 말한다 해도, 그 말 뒤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되어야"라는 기준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왕은 다릅니다. 그는 조건을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왜 사랑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저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받는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맵니다. 그가 어디서 양 떼를 먹이는지, 어디서 쉬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인은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다니지만, 그는 숨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물음을 던집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사야서는 이 물음에 대해 놀라운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 계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해졌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였습니다. 당연히 즉시 달려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이틀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예수님 앞에서 마르다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것은 우리가 늘 품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응답해 주셨더라면, 그러나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은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병을 고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분이 나사로에게 가신 이유는 죽음에서 깨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병 낫는 것으로 끝났다면, 나사로는 그저 병에서 회복된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더 크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더 늦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오랫동안 사업 실패와 가정의 위기를 겪으며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인이었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 시간이 몇 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가 고백한 것은, 바로 그 무너지는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회복이 찾아왔을 때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방식으로 응답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죽음에서 깨우시는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이를 찾지 못해 애태우는 여인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여라." 사랑하는 자를 직접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발자취를 따라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 세상에는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발자취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발자취 위에 겹쳐지는 우리 자신의 발자취가, 얼마나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내가 얼마나 자주 믿음 없는 자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폭풍 속에서 주무실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문제를 해결해주셨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지, 너희가 아직 죽음과 두려움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문제가 사라지고 상황이 편안해지는 것이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자각으로 이끕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내가 얼마나 죽어 있는지를 먼저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찾아오신 사랑의 무게를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게달의 장막처럼 검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는 여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때입니다. 조건이 없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셨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깨우시는 사랑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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