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가 2:8~9)
어느 날 오후, 한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창밖 너머로 골목 끝이 아스라이 보이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손이 멈췄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알았습니다. 뛰어오는 발소리, 숨을 헐떡이는 리듬, 운동화 바닥이 아스팔트를 치는 그 특유의 소리, 아들이었습니다. 골목 끝에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이미 앞치마를 벗고 현관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발소리를, 기척을 압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압니다. 그리고 그 앎은 머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어딘가에서 솟아오릅니다.
아가서의 여인도 그랬습니다. 아가서 2장 8절에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그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산 너머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알아챕니다. 그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산을 넘고, 작은 산을 뛰어넘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 담긴 그림은 놀랍도록 구체적입니다. 달려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뛰고 있습니다. 급합니다. 지체하지 않습니다. 산이 있어도, 언덕이 가로막아도, 방향을 꺾지 않습니다. 목적지는 오직 한 곳, 바로 그 여인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달려오는 자는 누구이며, 달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목자에 비유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낯선 자의 목소리는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냥 흘려듣기엔 너무 깊은 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성공을 외치는 목소리, 더 가지라고 부추기는 목소리, 너는 충분하지 않다고 속삭이는 목소리, 저 길이 맞다고 손짓하는 목소리들, 우리는 매일 그 소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소음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다른 목소리를 듣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들리는 목소리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떤 구절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 예배 중에 찬양 한 소절이 갑자기 깊이 박히는 경험, 기도 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냥 울게 되는 경험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보는 순간인 것입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그 목소리를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가 내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처럼,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하고 알아채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더 열심히 기도하면, 내가 더 많이 헌신하면, 내가 더 거룩해지면,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산을 올라가는 사람처럼, 꼭대기에 계신 주님을 향해 나 자신이 땀 흘리며 오르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그 방향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달려오는 쪽은 내가 아닙니다. 달려오시는 분은 그분입니다. 여인은 서 있습니다. 창가에서, 혹은 집 안에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가 산을 넘어 달려옵니다. 여인이 준비를 갖추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더 예뻐지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끝까지 달려옵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 그는 집 근처에도 이르기 전에 이미 아버지에게 발견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아버지가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아직 자기 연설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돌아서기 전에 이미 아버지의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이미 사랑이 달려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사랑하는 자는 산을 넘습니다. 가파른 산입니다.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험한 산을 넘는 일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한 여인의 자궁 속에 들어가시고, 말구유에 누이시고, 목수의 집에서 자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이 멈출 수 있는 지점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흐를 때, 빌라도 법정 앞에 섰을 때, 그러나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해, 당신을 향해 달려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열대 지방의 오지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말년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곳에서 그 긴 세월을 사셨습니까?" 선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먼저 나를 위해 오셨으니까요." 그 한 마디가 수십 년을 설명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달려오신 사랑은, 달려가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찾아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걸까?" 기도가 뜨겁게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헌신이 기쁜 날도 있지만, 의무감으로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사랑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바치거나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알아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아이가 "엄마 사랑해"라고 말할 때, 그 아이가 어머니를 위해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아이는 받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해"는 진짜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어쩌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드렸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이 가슴에서 눈물이 되고, 감사가 되고, 결국 삶으로 번져가는 것입니다.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압니다. 달려오시는 그분의 사랑 앞에서, 내 사랑이 얼마나 느리고 미지근한지를 압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헌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삶에는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무너지는 일이 생깁니다.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더 어렵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은 오지 않고, 오히려 상황은 나빠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랬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고센 땅에서 벽돌을 찍으며,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출애굽의 이야기는 그 고난이 결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달려오고 계셨습니다. 우리 삶의 고난도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손길이 우리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은 때로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게 하고, 내가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결국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달려오시는 주님 앞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혹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무엇으로 읽습니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으로 읽습니까? 좋은 격언들의 모음으로 읽습니까? 아가서의 여인처럼 읽는다면 어떨까요.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하고 알아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나를 향해 달려오시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책장을 넘길 때, 그 안에서 나를 찾으시는 분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나의 탐욕을 지적하는 구절도, 나의 게으름을 깨우는 말씀도, 결국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어떤 내용이라도, 결국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은 그를 기다립니다. 그가 달려오고 있음을 압니다. 곧 벽을 넘고 창으로 엿볼 것임을 압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기다림 안에 있습니다. 이미 달려오신 사랑,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온전히 대면하지 못한 사랑, 마침내 그 얼굴을 볼 날이 기다려집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삽니다. 이미 왔고, 아직 오지 않은, 이미 사랑받았고,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달려오는 쪽은 언제나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단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 목소리를 알아채는 것,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하고, 가슴이 뛰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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