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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아가

아가서(08) - 함께 가자는 사랑의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가 2:10~14)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친구는 한때 큰 실패를 겪고 사람들을 피해 깊은 시골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부끄럽고, 초라하고, 도저히 예전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었더니 오래된 친구가 서 있었습니다. 진흙투성이의 신발로, 몇 시간을 걸어온 흔적이 역력한 얼굴로 말입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왔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긴 침묵과 거리를, 찾아온 친구가 먼저 건너온 것입니다.

아가서 2장은 이 단순한 장면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여인에게 달려와 말합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함께 가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를 먼저 떠올립니다. 동행의 결과, 동행이 가져다줄 혜택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지점은 그곳이 아닙니다. 감동은 '누가 누구에게 찾아왔는가'에 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에 대해 냉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스스로를 더럽혔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망과 판단을 앞세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은 하나님의 야박한 처사가 아니라, 이미 그 길을 걸을 수 없게 된 인간의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 그것 자체가 심판이고 저주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옥을 먼 훗날의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간에게 사랑하는 자가 달려와 말합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여기서 잠깐, 우리가 흔히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내 삶에서 어려운 일이 잘 풀리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며, 평탄한 길이 열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해 속에는 조용한 함정이 있습니다. 사랑의 기준이 십자가에서 세상의 형편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사랑을 완성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 일이 잘 풀려야 그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선물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기르고,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킨 그 모든 사랑의 무게는 잊고, 오늘 과자를 사줬는지 아닌지로 사랑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이것을 보며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가서의 사랑하는 자는 여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면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쳤다고 합니다. 사랑이 오는 길목의 모든 걸림돌이 이미 제거된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무화과 열매가 익고, 포도나무에서 향기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들은 여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오는 세계가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받기 위해 여인이 먼저 아름다워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먼저 예뻐져라, 먼저 깨끗해져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조건이 있었다면, 아무도 '함께 가자'는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보다 더 숨기 좋은 장소가 있을까요? 부끄러움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혹은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 깊은 곳에 웅크려 있는 비둘기를 사랑하는 자는 찾아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숨어 있는 자를 찾아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진흙 묻은 신발의 친구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먼저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숨어 있을 때,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 그
'아직'의 시간 속으로 사랑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네가 먼저 가야 한다. 더 선해져야 한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더 깨끗해져야 한다.' 이것은 얼핏 경건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이미 그 거리를 건넜는데, 우리가 그 거리를 다시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르는 자가 사랑을 향해 달려간다 해도,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우상일 뿐입니다. 진짜 사랑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오히려 사랑의 깊이가 더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실패했을 때, 약해졌을 때, 아무도 함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초라해졌을 때, 그때도 여전히
'함께 가자' 하시는 음성이 들린다면, 그것이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형편은 왔다 갑니다. 아무리 빛나던 날도 뒤돌아보면 한순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한순간 한순간을 관통합니다. 겨울을 지나고, 비를 뚫고, 바위 틈까지 찾아와 '너와 함께 가겠다' 하시는 그 사랑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는 자는 세상 형편이 아니라 그 음성에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