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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아가

아가서(21) - 사랑의 즐거움, 세상이 모르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0.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아가 7:1~9)


어느 봄날 오후, 한 중년 여인이 오래된 사진첩을 펼쳤습니다. 결혼 초 남편이 찍어준 사진들이었습니다. 지금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얼굴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주름이 없던 피부, 가늘었던 허리, 빛나던 눈빛, 그녀는 잠시 사진을 내려놓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아름다웠는데, 그리고 곧 다른 생각이 뒤따라왔습니다. 지금의 나는?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는 해도, 아름다움은 언제나 만들어지고 가꾸어지고 인정받아야 하는 무언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고, 맞추지 못할 때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아가서 7장을 처음 읽는 사람은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신랑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데, 그 표현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넓적다리가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다"고 하고, 배꼽은 "포도주를 가득 부은 둥근 잔 같다"고 하며,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할까요? 어떤 기준으로 노력한다 한들 이런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낯섦이 아가서가 전하려는 핵심입니다. 아가서의 아름다움은 여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기준을 충족시킨 결과물도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랑의 눈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름다움의 문법으로는 해독되지 않습니다.

여인은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검지만 아름다워요"(아 1:5). 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탓에 얼굴이 검게 탄 여인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한 시골 여자입니다. 그런데 신랑은 그녀를 "내 사랑", "어여쁜 자", "귀한 자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여인의 외모가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에 관한 깊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니 나는 그 사랑에 응답해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얼핏 경건하게 들리는 이 생각에는 그러나 치명적인 오류가 숨어 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아름다움은 결국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 됩니다. 신랑의 사랑이 신부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어 신랑의 마음을 이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화가가 오래된 캔버스 한 장을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세월에 찌들고, 군데군데 얼룩지고, 어떤 그림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든 낡은 캔버스입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위에 공들여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 그림, 왜 이렇게 아름답죠?" 화가는 웃으며 말합니다. "캔버스가 원래 좋았던 게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안에 아름다움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 위에 덧입히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은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했고,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홍수 심판은 그 부패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이후에 언약을 세우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언약은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게 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부패한 세상을 언약으로 덮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부르지 않겠다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내미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그 언약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사랑은 부패하고 초라한 우리를 덮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어여쁜 자"가 됩니다.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는 신랑의 노래를 듣는 신부가 됩니다.

6절에서 신랑은 노래합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화창하다'는 것은 흠이 없고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맑고 화창한 봄날이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듯, 여인의 아름다움이 신랑에게 즐거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인이 스스로를 가꾸어서 아름다워진 데 있지 않습니다. 신랑이 먼저 아낌없이 부어준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이 여인을 아름답게 했고, 그 아름다움이 다시 신랑에게 즐거움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신부다운 신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아름답다고 여겨주는 신랑의 사랑 앞에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이 사랑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하나님께서 몸의 덜 귀한 지체를 더욱 귀하게 입혀 주시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에게 더욱 아름다운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것으로 입혀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비교하거나 경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귀중한 것으로 아름다운 지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이 커진다고 내 아름다움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름다움은 같은 곳, 십자가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중년 여인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녀는 사진첩을 덮으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늙었고, 예전만 못하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신랑의 눈에 아름다운 신부는 젊음이나 외모로 판정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기대에 어긋나고,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의 실패 위에 덧씌워진 완성의 선언입니다. 그 선언이 사랑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사랑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 안에 우리는 오늘도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