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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아가

아가서(23) - 신랑의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관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4.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아가 8:1~4)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빚을 지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어머니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예요. 화내셔도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단 한 문장이었습니다. "어서 와라. 밥은 먹었니?" 아들이 아무리 못나고 초라해졌어도,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더 성실하게 봉사하세요." "신앙생활에 힘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옳고 경건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이 조용히 뒤틀립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느 순간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조건의 관계, 자격의 관계로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아가서 8장은 그 뒤틀림을 바로잡는 노래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은 신랑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고대 사회에서 입맞춤은 가족 사이의 자연스러운 애정 표현이었습니다. 오라비와 동생은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랍니다. 동생이 그 관계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잉태되는 순간, 이미 오라비와의 관계는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동생이 잘나든 못나든, 형제라는 관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입맞춤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여인은 신랑과의 관계를 바로 이 눈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 안에서 이미 시작된 관계입니다. 동생이 오라비를 선택하지 않았듯,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으로 인해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2절과 3절은 그 사랑을 깨달은 여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여인이 신랑을 어머니의 집으로 이끄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딸이 잘못을 저질러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살아 있는 공간, 그것이 어머니의 집입니다. 여인은 그 집에 신랑을 들이고, 신랑에게서 교훈을 받습니다. 자신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신랑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진실을 사랑하는 이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그 사랑으로 신랑에게 석류즙을 마시게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이 신랑에게 대접하는 것은 여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신랑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인에게 기쁨이 생겼고, 그 기쁨을 다시 신랑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드린다는 이 구조 속에,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감사도, 모두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내가 먼저 드려야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결심해야, 내가 먼저 변해야, 내가 먼저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분들은 사실 매우 성실하고 진지합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밤마다 기도하며, 봉사와 헌금도 충실히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늘 불안이 있습니다.
'내가 충분히 했을까? 오늘은 기도가 짧았는데, 하나님이 실망하시지 않을까?' 사랑이 기쁨이 되지 못하고 불안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 딸들은 여인에게 사랑을 서두르게 하고, 사랑을 인위적으로 흔들어 깨우려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정도의 신앙생활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더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주변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당신은 뭘 하고 있느냐?' 이 목소리들은 사랑의 관계를 흔들어, 우리를 다시 조건과 자격의 자리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흔들지 말라고, 깨우지 말라고, 신랑의 사랑이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은 우리의 행위와 결심으로 보완해야 할 미완성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진 사랑입니다.

처음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아들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흐느꼈던 이유는 어머니가 그를 칭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화내도 좋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오히려
"어서 와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 사랑이 아들을 무너뜨렸고, 그 사랑이 아들을 집으로 이끌었습니다.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내도 됩니다"라고 고개 숙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 속에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서 와라"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드러내고,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초라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여전히 사랑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부 된 신자의 권세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이유이고, 쉼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사랑,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