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 8:5~7)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서는 무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이 자기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지, 자신을 향한 생각과 기준이 실제로 달라졌는지는 잘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받은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 변화가 없다면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거나, 받고도 그 사랑을 오해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노래합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6절). 우리가 흔히 사랑의 힘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입니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이 강하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수사의 차이가 아닙니다.
죽음의 강함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은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재산도, 지위도, 건강도, 사람들의 인정도, 스스로 쌓아온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죽음은 한 사람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던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어냅니다. 그것이 죽음의 강함입니다. 죽음은 설득되지 않습니다. 협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모든 자랑을 무(無)로 돌려버립니다.
여인이 사랑을 죽음 같이 강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입니다. 사랑의 강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자랑을 모두 무너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인 신앙의 연조, 선한 행실, 남다른 헌신, 도덕적 자부심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 곁에서 그의 아들이 밤을 새워 간호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밤새 곁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산도 없고, 건강한 몸도 없고, 사회적 영향력도 오래전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거기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들이 아버지가 무언가를 베풀어줄 때만 곁에 있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조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이 내 기대를 전혀 채우지 못할 때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종종 거꾸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더 풍성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 형통, 안정, 관계의 회복, 이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사랑의 증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소비적 기대입니다. 사랑의 강함은 소유를 확장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여인은 사랑에 이어 질투를 노래합니다.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6절). 우리는 질투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부정적인 감정을 먼저 떠올립니다.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감정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함께 등장하는 질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질투가 없는 사랑을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 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무관심이 사랑의 부재를 증명합니다. 질투는 사랑의 관계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이 성경 곳곳에서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당신이 사랑으로 택하신 사람을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은 하나님이 쉽게 분노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실재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한번 붙든 사람을 놓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한번 택하신 사람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의 불은 물로도 꺼지지 않고, 홍수로도 삼켜지지 않습니다.
여인은 신랑에게 청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6절). 고대 세계에서 인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인장은 신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유와 권위의 표시였으며,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친밀한 물건이었습니다. 왕이 인장 반지를 넘겨준다는 것은 자신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여인이 원하는 것은 신랑의 부요함이나 신랑이 가져다줄 안락한 삶이 아닙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신랑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자리를 갖는 것입니다. 신랑의 팔에, 신랑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지는 것. 그것이 여인의 소망의 전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전부인 사람은, 더 이상 조건으로 사랑을 측정하지 않습니다.
7절은 선언합니다.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랑은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낭만적인 격언이 아니라, 복음의 논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신앙의 열심을 바치고, 착한 행실을 내밀고, 헌신의 목록을 들이민다면,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사랑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래의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를 소멸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우리를 삼키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탔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불을 몸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사랑의 강함이고, 질투의 끝이고, 죽음 같은 사랑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더 주십사는 요청이 아니라, 주신 사랑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 많은 물도 끄지 못하고 홍수도 삼키지 못하는 그 사랑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아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가서(23) - 신랑의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관계 (0) | 2026.03.24 |
|---|---|
| 아가서(22) - 무조건적 사랑의 비밀, 사랑의 이유 (2) | 2026.03.16 |
| 아가서(21) - 사랑의 즐거움, 세상이 모르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0) | 2026.03.10 |
| 아가서(08) - 함께 가자는 사랑의 의미 (0) | 2026.03.01 |
| 아가서(07) - 달려오는 사랑, 그리스도의 무조건적 은혜 (1) | 2026.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