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아가 8:8~9)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오빠들은 그녀를 '작은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귀여움을 담은 애칭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는 '하찮다', '볼품없다'는 체념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빠들의 눈에 그녀는 여자로서 갖춰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가서 8장 8절에서 오빠들은 대놓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 말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너는 볼품이 없으니, 과연 누가 너에게 청혼이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시선은 오래되었습니다. 인류가 선악과를 먹은 날부터 시작된 시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진 후 가장 먼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모습으로 서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부끄러운 것을 가려야 한다는, 그 오래된 본능이 바로 거짓 사랑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자랐습니다. 더 예뻐야, 더 착해야, 더 능력이 있어야,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공식은 교회 안에서도 살아 숨 쉽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헌금을 더 드려야', '봉사를 빠지지 않아야'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빠들의 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유방이 없으면 청혼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 남자는 오빠들이 손가락질한 바로 그 부분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4:5).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7:8). 조롱의 대상이 찬미의 대상이 됩니다. 결핍이라 불리던 것이 아름다움이 됩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여인의 몸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 사랑이 여인을 아름답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대상을 발견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 임하고, 그 사랑이 대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것이 아가서가 증거하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사실 주름지고 붉고 울음만 터트리는 존재입니다. 객관적으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왜입니까? 그 아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의롭고 선하고 아름다워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아름답다 하시고, 귀하다 하십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복음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오빠들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선의처럼 들립니다. 약한 누이를 지켜주겠다는 오빠들의 다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전제는 '너는 보호받아야 할 약자'라는 것입니다. 성벽이 부족하니 망대를 더 올리겠습니다. 문이 허술하니 판자로 막아주겠습니다. 누이의 부족함을 오빠들의 힘으로 채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인이 이미 더 크고 완전한 사랑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7절이 말합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홍수도 끄지 못하는 사랑, 온 가산을 쏟아도 살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이 이미 이 여인을 붙들고 있습니다. 오빠들이 쌓으려는 은 망대가, 두르려는 백향목 판자가 이 사랑 앞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낫지 않는 것이니, 더 기도하면, 더 헌신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갔고, 봉사를 두 배로 늘렸고, 금식을 더했습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은 망대들, 그러나 병은 낫지 않았고, 그는 결국 지쳐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에, 노력이 무너지자 사랑도 함께 무너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것이 거짓 사랑이 만드는 비극입니다. 은 망대가 높아질수록 사람은 더 불안해집니다. 망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가서의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7:10). 자신의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방이 충분한지, 오빠들이 망대를 세워주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는 그에게 속해 있고, 그가 나를 사모한다'는 사실만을 말합니다. 사랑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가치로,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세상의 망대가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현실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 잘남이나 못남과 상관없이 이미 사랑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방이 없어도 이미 아름답다고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빠들이 망대를 쌓기 전에, 내가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홍수로도 끌 수 없고, 온 가산으로도 살 수 없고, 내 실패로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작지도, 하찮지도, 약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누이'가 아닙니다. 오빠들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거짓 사랑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참된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내가 완전해진 후에야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이미 열려 있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가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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