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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아브라함의 언약 - 약속을 대신하려는 인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9.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로마서 4:17)

사람은 기다리는 일에 약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 앞에서조차 우리는 조급해집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약속이 더디게 보이면 슬그머니 우리의 손을 보태려 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사라는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기다림 대신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을 이루는 방식은 자신이 정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불신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의 능력을 보태어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처럼 만들어진 열매는 언약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그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무려 13년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는 시간, 하늘이 닫힌 것 같은 침묵의 세월, 아브라함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침묵을 오해합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닐까?” 그러나 이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정리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첫마디가 이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부담스럽습니다. 이미 실패한 사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요구가 아니라 선언입니다. “네가 완전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내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하심은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능력’,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힘’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전능하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하신 자기 약속을 인간의 실패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루어내시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처럼, 도깨비 방망이처럼 대합니다. 필요할 때 문지르면 원하는 것을 꺼내주는 신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면서 열심과 충성을 바칩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빙자한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 아직 아들은커녕, 약속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이미 이름부터 바꾸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현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라 역시 이름이 바뀝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웃습니다.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습니다. 그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말도 안 된다”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웃음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웃음을 언약 성취의 배경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불신을 배경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매일같이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브라함은 기억했을 것입니다.
“나는 믿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구나.” 이 원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저주라 여겼고, 제자들조차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말리는 자리에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습니다. 사람의 일은 언제나 십자가와 원수가 됩니다.

사람의 가능성, 사람의 자랑, 사람의 종교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시내산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이는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을 말하면서 사람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할 수 있다”, “해내라”, “믿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는 자기 꿈과 목표를 정해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밀어붙이는 인본주의입니다. 번영의 신학이며, 성공신화의 종교화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로마서 4장 17절의 고백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이 믿음은 훈련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심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배운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약속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는 항복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기다리십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태어난 약속의 열매를 말입니다. 그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언약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