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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비유 - 새 술과 새 부대(신랑을 빼앗긴 자의 금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8.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5:37~38)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정권이 바뀔 때도, 조직이 개편될 때도, 누군가 새로운 출발을 선언할 때도 이 말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단순한 변화나 갱신의 구호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결심이나 새 출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무너지는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 레위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을 때, 사람들은 불편해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 속에는 나름의 정당함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경건해 보였고, 더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금식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금식은 신랑을 기다리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이미 와 계신데, 여전히 금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불신이 됩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인간의 정직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사실 우리는 묵은 것을 좋아합니다. 열심히 하면 보상이 따라오는 구조, 애쓰면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 금식과 헌신과 경건으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체계, 그 안에서는 내가 여전히 주인입니다. 조금 낮아지는 것 같아 보여도,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불편하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달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손을 비워야만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광야의 목적이 인간을 낮추고, 주리게 하며, 시험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 광야의 길을 예수님이 먼저 걸으셨습니다. 40일 금식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요약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패했던 자리에서 끝까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한 금식을, 우리가 끝내 살지 못한 광야의 삶을, 예수님은 온전히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더 이상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옛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종종 모순처럼 보입니다. 금식의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주리지 않은 것처럼 살고, 낮아진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상처받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은혜가 다시 선명해집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왜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성도는 성공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내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붙듭니다.

새 옷은 헌 옷을 찢습니다. 새 술은 헌 부대를 터뜨립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인생을 편안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그 찢어짐은 저주가 아닙니다. 은혜가 들어오기 위한 자리입니다. 내가 쌓아온 신앙의 자랑, 나를 지켜주던 종교적 자존심,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여겼던 나의 부대가 깨질 때, 비로소 새 포도주가 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은 십자가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 우리는 예수를 잃은 피해자가 아니라, 예수를 죽게 한 가해자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주님, 그 죽음이 필요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 고백이 성도의 금식인 것입니다.

성도는 신부입니다. 신랑 없이는 존재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신랑이 기뻐하시면 기뻐하고, 신랑이 침묵하시면 기다립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랑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주인이 되라고, 판단자가 되라고, 중심에 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다시 신부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약하고, 의존적이며, 덮임이 필요한 자리로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합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성과가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나를 설명하고 있는가? 내가 붙들고 있는 묵은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증명하려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도 나를 찢으시는 은혜 앞에서, 다시 한 번 신랑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저의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