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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봄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31.

아침과 봄은 닮아 있습니다. 둘 다 시작을 알리고, 깨어남을 요구하며, 생명이 아직 상처 입지 않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내적 상태는 아침과 봄 앞에서 가장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흔히 건강을 혈압이나 맥박으로 측정하지만, 인생의 건강은 아침과 봄에 얼마나 공명하는가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 한 사람이 산책을 나섰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길, 공기는 차갑지만 맑았습니다. 동쪽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고, 나무 사이에서는 새들이 하루의 첫 문장을 쓰듯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 속을 지나가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새소리는 소음처럼 들렸고, 바람은 피부에 닿았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았습니다. 잠은 여전히 몸에 눌러 붙어 있었고, 그는 그저 ‘의무적으로’ 걷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자연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내면이 깨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봄이 와도 설레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꽃이 피어도 그저 “아, 또 피었네” 하고 지나쳐 버리는 태도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개나리 한 줄기에도 이유 없는 기쁨이 솟구쳤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꽃을 배경으로만 소비합니다. 사진은 찍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봄은 여전히 오지만, 우리 안에서는 더 이상 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반응 능력이 둔해졌다는 신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미 하루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반면 많은 어른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계산을 시작합니다. 해야 할 일, 피해야 할 일, 견뎌야 할 일, 하루는 기대가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아침은 더 이상 시작이 아니라, 어제의 연장이 됩니다. 아침 산책을 해도 잠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피곤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삶에 대해 “깨어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들리는 새소리는 참 이상합니다. 그들은 하루를 보장받지 못했음에도 노래합니다. 내일의 먹이를 계약한 것도 아니고, 오늘이 안전하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래합니다. 생명은 원래 그렇게 응답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산 이전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소리를 들어도 전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청력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숨 쉬고, 일하고, 말하고, 웃을 수 있습니다. 맥박도 느껴지고, 일정도 소화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는 이미 계절이 지나가 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의 봄과 아침이 지나간 사람은 늙어서가 아니라, 반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늙은 것입니다.

봄은 묻습니다. “너는 아직도 살아 있느냐?” 아침은 묻습니다. “오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아무런 내적 파동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쩌면 너무 오래 버티기만 했고, 너무 오래 기능적으로만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감탄하는 법을 잃고, 놀라는 능력을 잃고, 감사가 아니라 무감각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자연은 매년 봄을 포기하지 않듯, 아침은 매일 다시 찾아옵니다. 문제는 봄이 오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깨어날 수 있느냐입니다.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아침 공기를 의식적으로 들이마셔 보십시오. 새소리를 ‘정보’가 아니라 ‘부름’으로 들어 보십시오. 꽃을 배경이 아니라 메시지로 바라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침과 봄에 다시 반응하기 시작할 때, 그대의 인생도 다시 건강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