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이 대립되는 양면이 본래 하나였음을 모르고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에 고집스레 매달려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을 '아침에 셋'이라고 합니다. 원숭이 사육사가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전자는 원숭이를 화나게 했고 후자는 기쁘게 했습니다. 원숭이 사육사는 원숭이들이 원하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옳고 그름'을 조화시키고 '자연의 균형'에 편안해야 합니다. 이것을 '두 길을 동시에 따른다' 라고 합니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처음에 제안했던 방식은 그가 판단하기에 최선이었습니다. 나름 원숭이를 배려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그 제안에 화를 냈습니다. 그때 사육사는 자신의 제안이 원숭이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굳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안이 원숭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원숭이들이 기뻐했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세 개와 네 개, 결국 일곱 개로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셋을 먼저 주겠다는 말에 원숭이들은 성을 내고, 아침에 네 개를 먼저 준다는 말에는 기뻐합니다. 이 고사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본질'보다 '형식', '의도'보다 '기분', '실제 내용'보다 '표현 방식'에 더 크게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도 원숭이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좋은 뜻으로 조언을 해도, 그 말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을 닫습니다. 아무리 진실하고 옳은 이야기라도, 내 기준과 정서에 맞지 않으면 불편해하고 밀어냅니다. 그리하여 결국 '내용'이 아니라 '나의 해석'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 고사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인물은 사육사입니다. 그는 원숭이들을 화나게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합리적 판단과 선의를 가지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이 좋지 않자,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기꺼이 방식만 바꾸어 다시 제안합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같은 도토리 수를 주면서도, 원숭이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다르게' 말합니다.
그는 '아침에 셋'이라는 고집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옳은데 왜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교만함도 없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만이 아니라, 무엇이 평화로운가, 무엇이 받아들여지는가를 함께 고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길을 동시에 따르는 지혜입니다. 하나는 이치이고, 또 하나는 마음입니다. 하나는 논리이고, 또 하나는 관계입니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 일어납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이 충돌할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의 논리로만 상대를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우침 없는 마음입니다. "나는 옳다"는 생각에서 한 발 물러서서, 상대의 시선으로, 감정으로, 입장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같은 도토리 일곱 알을 두고도 화를 내는 대신 기뻐할 수 있고,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아침에 셋'을 내려놓고 '마음을 얻는'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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