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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어둠보다 먼저 깨어 있는 것 - 희망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0.

희망은 언제나 환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이 켜지기 직전, 아직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조용히 서성입니다. 세상이 변하기 전, 상황이 나아지기 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은 이미 깨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직 잠에 취해 있을 때도, 희망은 졸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며 한 발을 내딛는 힘입니다.

희망은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곳에서 자랍니다. 버섯 안쪽의 주름처럼, 감자의 움푹 들어간 눈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생명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세상은 강한 것을 통해 일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그 극치입니다. 가장 패배처럼 보였던 자리에서 구원이 싹텄고, 가장 굳게 닫힌 무덤에서 생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민들레의 머리에서 터져 나가는 홀씨들은 작은 별들처럼 흩어집니다. 그것은 통제되지 않고, 계산되지 않으며,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질서 속에 미래가 숨어 있습니다. 희망은 늘 이런 방식으로 퍼집니다. 계획과 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맡김과 신뢰의 열매로, 바람에 자신을 내어맡긴 씨앗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숨결에 삶을 맡길 때 비로소 다음 계절로 옮겨집니다.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회전하며 출항하는 녹색 천사의 날개는, 희망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희망은 기다림이지만 동시에 출항입니다. 머무름 같지만, 실은 보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랬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라.” 희망은 목적지를 모두 알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떠날 용기를 줍니다.

삽과 호미의 잔인함을 견뎌 낸 지렁이의 마디마디에 희망이 살아 있다는 표현은, 고난을 통과한 생명의 끈질김을 떠올리게 합니다. 믿음의 삶에는 상처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성도는 흙을 뒤집는 도구 앞에서 수없이 잘리고 끊어지지만, 하나님은 그 잘린 자리에서 다시 생명을 이어 붙이십니다. 고난은 희망의 반대가 아니라, 희망이 뿌리내리는 토양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단순한 동작, 갓 태어난 아기가 첫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희망은 거창한 신학 개념이기보다, 이렇게 몸으로 드러나는 생명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숨 쉬고 싶다는 욕망,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충동, 오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단,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두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파괴할 수 없는 고유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이 희망을
“죽음을 삼키는 생명”이라 부릅니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반박이며, 절망에 대한 논리입니다. 부활은 희망의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미래를 발명하게 합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서로에게 묶어 줍니다. 우리가 서로를 저버리지 않도록 약속하게 하는 치료제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함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의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는 날이 있어도, 희망 자체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은 말해지려 애쓰는 자리 안에 담겨 있습니다. 완전히 설명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말하려는 시도 속에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다 설명하지 못해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 향해 말을 건네는 그 행위 자체가 희망입니다. 희망은 그래서 조용히 말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다음 아침을 향해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