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5~19)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흠모해 온 음악가의 연주회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그 음악가의 음반을 들어왔고,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도 읽었으며, 그의 연주 기법을 분석한 논문도 섭렵했습니다. 그러나 공연장에 들어서 첫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은 그 음악가에 대한 지식이었지, 그 음악가를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식과 앎 사이에는 그런 깊은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장을 읽을 때마다 그 강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베소서 1장은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한가운데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빚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셨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안에 두셨습니다. 그 모든 은혜의 끝에서 성도의 삶에 피어나는 열매가 15절에 나옵니다. 믿음과 사랑, 이 두 단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을 가리켜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수식어가 핵심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대상을 향하는 것이고, 그 대상을 알아야 비로소 성립합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열심의 양으로 측정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었는가, 헌금을 얼마나 드렸는가, 봉사를 몇 시간이나 했는가,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척도가 아닙니다.
신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열심히 종교적 의무를 수행한 자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열심은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대상에 대한 앎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이 단순한 소원 성취의 창구가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심을 아는 것, 거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이 지점을 놓치면 신앙은 끝없는 혼선 속에 빠집니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다했는데 왜 응답이 없느냐"는 탄식은, 사실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주는 도구로 삼은 자의 불평입니다. 주인에게 종이 명령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풀무불 앞에 선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형상입니다. 결과를 조건으로 달지 않는 신뢰, 그것입니다.
삶은 이 진리를 수없이 증언합니다. 한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심각한 병으로 2년을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제발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침상에서 그는 성경을 처음으로 깊이 읽기 시작했고, 기도의 참 의미를 배웠으며, 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훗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때 바로 건강이 회복되었다면, 저는 다시 세상으로 뛰어나갔을 겁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가장 깊은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솔직하게 되짚어보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훗날 돌아볼 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간의 저편을 보고 계십니다.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강하게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처럼, 집중하고 긍정적으로 선언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오래전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이 기독교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긍정적 태도가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의 원리로 삼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내 의지와 열심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숨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맹신이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면서 그저 "나는 믿을 거야, 믿어야만 해"라고 자기 암시를 거는 것은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분을 알수록 깊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디도서 3장이 우리의 본래 모습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가리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가진 자들이라 부릅니다. 어떻게 이 변화가 가능합니까? 의지의 결단으로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진리 안에서 영혼이 새로워진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도 대어주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도덕 교과서의 훈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해졌다고 고백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주차된 차에 후진하던 차가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분명 상대방의 과실이었는데 그 운전자가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그리스도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게 억울하시면 그냥 가세요." 그 말 한마디에 상대방의 얼굴이 풀리며 물었다고 합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방향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풍요가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매튜 헨리의 어머니가 가문도 변변치 않은 필립 헨리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께 남긴 말입니다. "어머니, 저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는 알아요."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이 땅의 작은 손해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천국의 풍요는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자들은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고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섭니다. 믿음도 있고 사랑도 실천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바울은 왜 여전히 간절히 기도합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더 필요한 것이 있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거듭남은 출생이지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살아있다고 해서 다 자란 것이 아닌 것처럼,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자도 자라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다만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그 위대한 사도조차 여전히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라야 합니까? 바울의 기도는 명확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는 것, 그것이 영적 성장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앎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가복음에서도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라면 귀신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구하는 앎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 같은 앎, 인격 전체가 걸린 친밀한 앎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잠을 깨어 고백했을 때의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사야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를 보았을 때 절로 터져 나온 탄식, "화로다, 나여,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그 앎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임재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석학들이 치밀한 논리로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에 이를 때, 어딘가의 이름 없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차이는 지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고, 우리에게 그 지식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기도가 그토록 힘겹게 느껴집니까. 왜 30분도 채 채우지 못하고 할 말이 바닥납니까. 솔직하게 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가슴 깊이 신뢰하는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과는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다음 날 또 만나도 할 말이 넘칩니다. 왜그런가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그 사람이 나를 잘 알며, 우리 사이에 쌓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왜 이야기할 거리가 없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 서먹하고, 서먹하니 기도가 의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구멍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으며, 오직 절대자가 채워주시기 전에는 그 공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그 구멍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쌓고,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이루어도 그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늕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친밀한 앎이 깊어질수록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갈망이 됩니다. 그 존전에 앉는 것만으로 복받쳐 오르는 감격이 생깁니다. 사슴이 마르지 않는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 날마다 그분을 더 알고 싶다는 갈급함이 생겨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이끈 자, 홍해를 가른 자, 수많은 기적을 목격한 자,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 대학 합격을 위한 기도, 사업 번창을 위한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깊은 자리, 가장 간절한 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갈망, 그분의 영광을 보고 싶다는 사모함이어야 합니다.
그 기도 안에 다른 모든 기도가 담겨있고, 그 앎 안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도여, 진정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존전에서 무릎이 꺾이는 그 앎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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