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6~19)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 그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밥 먹어라." 그 말 한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었겠습니까? 용서, 기쁨, 안도, 그리고 "이제 다시 살아라"는 간절한 바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그와 같습니다. 단순히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부르심 안에는 "이제 살아라, 이제 자라거라, 이제 네가 누구인지 알아가거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1장 17절부터 1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기도는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계속 자라가야 한다는 사도의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는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중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방학 과제물 검사를 했습니다. 한 아이는 과제물 대신 만화책을 제출했습니다. 당연히 크게 혼났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아이는 과제물을 아예 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만화책은 안 냈어요"라고 말하며 멀뚱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이도 혼나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해야 할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나는 술도 안 마시고 도박도 안 하고 죄도 짓지 않았어"라고 만족한 채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할 의무와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책망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은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세 가지를 경계하셨습니다. 방탕함, 술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입니다.
방탕함이란 무엇입니까? 거창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만이 방탕이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그 아들이 한 일은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흥청망청 써버린 것, 곧 시간과 자원을 허비한 것이었습니다.
술취함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십니다.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십니다. 마침내는 술이 사람을 삼킵니다. 그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음 날까지 그 영향이 이어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무언가에 이끌려 자라갈 시간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삼키는 것이 어찌 술뿐이겠습니까? 스마트폰 화면 앞에서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사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밤새 우리를 붙듭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가 이미 다 지나 있습니다. 우리를 중독시키고 시간을 빼앗는 것들, 그것들이 모두 경계의 대상입니다.
생활의 염려는 어떻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정말 굶어 죽을까봐 걱정합니까, 아니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봐, 내 체면이 손상될까봐 걱정합니까? 대부분은 후자입니다. 그런데 그 걱정이 쌓이고 쌓이면 마태복음 13장 22절이 말하는 것처럼, 가시떨기 속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고 막혀버립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고 돈이 좀 생기고 나서 예배당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그 돈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그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로막아 버린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는 자들입니다. 주가가 오르내리든, 이자율이 어떻게 되든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아끼십시오. 그 아낀 시간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쓰십시오.
로마서 12장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산제사란 무엇입니까? 제물이 쪼개지듯, 살아있는 몸으로 그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이 산제사의 삶입니다. 수학 문제를 누워서 풀 수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앉아 풀고 또 풀어야 겨우 풀립니다. 경건의 훈련도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혼자서는 그 부르심의 소망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총명을 밝히사"라는 말입니다. 이 조명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을 보면, 총명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총명이 밝아지는 것과 어두워지는 것, 이 두 갈래 길이 우리 앞에 항상 놓여 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하나님은 매일 새것으로 주셨습니다. 다음 날 것을 미리 쌓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신앙은 저축이 아닙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을 죄 사함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나는 이미 다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구원은 죄 사함에서 시작해 의와 거룩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영적 성장은 점진적이고 끊임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자라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는 것도, 시간을 아끼는 것도,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은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씨앗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나무가 될지, 어떤 꽃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해바라기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본다고 해서 그것이 장차 여름 햇살 아래 활짝 필 해바라기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땅을 기어다닐 때 자신이 하늘을 날 날개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번데기 속에서 마르고 죽은 것 같던 그것이 어느 날 찬란한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오릅니다. 우리의 몸도 그와 같습니다. 지금 이 3차원에 묶여 있는 이 몸이,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다가 저녁에는 낙심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의 결심과 감정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안한 구원입니까?
그러나 로마서 10장 13절부터 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누군가가 전파했기 때문이고, 그 전파자는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 그것이 흔들릴 리 없습니다.
이것이 내적 소명,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지나치는 소리로 남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 부르심이 "바로 나를 향한 것"으로 들릴 때, 그것이 내적 소명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한목소리로 권합니다. 그 부르심을 더욱 깊이 알아가라, 그 부르심을 굳게 하라고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확신은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체험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는 눈물로 예배드렸는데 오늘은 아무 감동이 없다면, 어제의 구원은 있고 오늘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2000년 전 골고다에서 일어난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닻은 배의 감정 상태에 따라 작동하지 않습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파도가 높아도, 닻은 바닥을 붙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그 어떤 설명보다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을 한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묘한 함정이었습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죄인들의 친구"라는 자신의 가르침이 무너지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손수 무언가를 쓰시는 장면은 세 번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돌판에 새기실 때, 그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돌판이 던져져 깨어지는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잔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전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우상을 찬양할 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썼습니다. 그날 밤 왕은 죽었습니다. 그것도 심판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3절은 말합니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흙에 무언가를 쓰신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죄 지은 자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앞에 서자,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습니다.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모두 사라졌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들이밀던 자들이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심판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넓은 성전에 이제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입니다.
왜 여인은 남았습니까?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망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죽어야 할 자임을 아는 사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도망쳐 나간 서기관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흙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이번에도 심판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에 적힌 이름이 여인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셨습니다. 그 여인이 번제단에서 쪼개져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도"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저들이 자기 죄 때문에 너를 정죄하지 못했듯이, 이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84편 3절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새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온한 곳에 알을 낳습니다. 그 죽음의 번제단이, 죄인이 쪼개져야 할 그 자리가, 이제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선언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은 여인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한마디를 더 하셨습니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이 부르심의 전부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그 부르심 안에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네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서신 것을 안다면, 이제 그 은혜에 걸맞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은 말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맨 처음의 그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방황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이제 밥 먹어라." 그 한마디는 단순한 식사 권유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네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살아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진정으로 안다면, 다시는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 소망을 알수록 죄는 더 싫어집니다. 그 소망을 알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이 말하듯,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한번 피 흘리기까지 싸워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히 아십니까? 그 소망은 흔들리는 우리 감정 위에 있지 않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 위에,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이라는 영원한 닻 위에 서 있습니다. 그 닻은 폭풍이 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도 걸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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