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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19) - 우리의 상속,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1.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5~19)

어느 소설가의 자전적 이야기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후회와 미련, 아쉬움이 번갈아 가며 가슴을 들락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신경숙의 『J 이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읽는 순간 무릎을 치게 됩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나온 날들을 연료 삼아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도 그것은 이미 꺼진 불입니다. 오늘을 살아내는 힘은 오직 앞에 있는 것, 즉 내일이라는 목표에서 나옵니다.

교도소에서는 사형수에게 집행 날짜를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날짜를 아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밥도 넘어가지 않고 다리에 힘이 풀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니겠지, 혹시 사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빼앗지 않습니다. 그 희미한 내일에 대한 소망이 그에게 하루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사람은 살기를 멈춥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별을 하나씩 품고 삽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별이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별을 바라보며 오늘을 견딥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 별들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동창 모임 인터넷 게시판이 있습니다. 거기에 글을 올리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습니다. 국회의원, 회사 사장, 언론사 국장이 된 이들은 당당히 이름을 내밀고 근황을 알립니다. 그런데 시골 중학교 사회 교사나 농장을 운영하는 선배는 찍소리도 못 합니다. 가치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것이 성공이라고 선언해 놓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실패자로 분류됩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소망은 세 곳으로 수렴됩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입니다. 저마다 다른 별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만 종착지는 같습니다. 신경숙이 일했던 출판사 사장은 처음에 한국 이념 서적을 총정리하겠다는 신념으로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 소설과 무협지를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그 대세를 거슬러 오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소망을 품고 삽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불확실한 무언가가 아니라, 명쾌하게 제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간구한 것도 이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알면 알수록, 오늘을 사는 힘이 달라진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소망은 점점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내세에 대한 관심은 옅어집니다. 이 땅에서 보고 즐길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이야기하면
"현실을 살아낼 능력 없는 자들의 도피"라는 핀잔을 듣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천국은 죽으면 마지못해 가는 곳 정도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니 이제 목사도 "천국은 나중에 가시고 여기서 오래 건강하게 잘 사세요"라고 해야 환영받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엄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민낯이 드러납니다.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 볼테르는 평생 기독교를 비판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의사에게 남긴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가 가진 것의 절반이라도 주겠소."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만일 빠져나갈 구멍만 있다면...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려 한다." 나폴레옹은 유언에서 이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내 깊은 비참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사이에는 얼마나 엄청난 심연이 깔려 있는가."

영국에
'무신론자 클럽'이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초대 회장이 임종 자리에서 클럽 동료들에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이제 나에게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난 지금 보고 있거든. 난 이제 큰일 났어." 반면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커버넌트 신학교 총장의 딸 브로닌 여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임종 자리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믿음의 선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부르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죤 웨인 쉴레터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 무덤에 꽃을 가져오지 마라. 나는 거기 없을 테니까. 먼저 유럽 구경을 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러 갈 거야. 우리는 곧 다시 만날 테니 울지 마." 그 자리에서 자녀들이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무디는 병상에서 잠시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상은 물러가고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있다. 이것이 죽음이라니, 죽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구나." 죽음 앞에서 이토록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믿지 못하고 죽어도 또 다른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연옥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 근거로 베드로전서 3장과 4장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 그곳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편지는 박해를 받으며 죽음에 직면해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라. 그들이 그분을 육체로는 죽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분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 저들이 너희를 죽인다 해도, 너희의 영은 결코 죽지 않는다." 노아의 홍수는 그 진실의 가장 선명한 모형입니다. 그때도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를 통해 경고하셨지만 방주로 들어간 것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통해 초대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저들은 결코 너희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사도신경의
"그는 지옥으로 내려갔다"라는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을 방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지옥을 몸소 경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흑암이 온 세상을 덮었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지옥의 불 속에 있던 부자가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에 대어 주소서"라고 애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목마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땅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죽음 이후에 또 다른 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세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땅의 삶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장사하는 아저씨를 만납니다. 아저씨는 갈증을 잊게 해주는 약을 팝니다. 이 약을 먹으면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왕자가 묻습니다.
"그 53분으로 무엇을 해요?" 아저씨가 대답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어린 왕자가 말합니다. "나라면 그 시간에 샘을 향해 걸어갈 텐데."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목마르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알기 때문에, 53분짜리 갈증 해소제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이들의 목마름을 돌아볼 여유가 생깁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세속적 개혁은 언제나 영적 부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학교와 병원과 구제기관과 노동조합, 이 모든 것은 내세를 알고 내세를 지향했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 자리로 갑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죽으면 끝이니 막 살자"는 논리에 이릅니다. 내세를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성실해집니다.

그 나라를 아는 사람은 고난도 다르게 견딥니다. 신앙은 우리를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 우리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것은 예외가 아니라 법칙입니다.

알프레드 윌리스의 자연과학 수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나무 누에나방이 고치를 찢고 나오는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고치 끝을 조금 찢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비는 손쉽게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비는 잠깐 퍼덕이다가 죽었습니다. 고치를 몸부림치며 찢어야 하는 바로 그 과정이, 날개에 체액을 밀어 넣어 나비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없애 버렸더니 나비는 죽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말힓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서 "인정하심을 받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로, 품질 검사를 통과해 공인 인증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 도장을 찍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면허증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그 앞에 놓인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만큼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그것이 그 나라의 본질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똑같은 몸이 되어 살 것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병들지 않으며,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요한이, 모세가 직접 올라가 보고 기록해 놓은 그 나라를,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그 영광의 기업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세상의 도둑이 오는 날처럼 갑자기 주님의 날이 찾아올 때, 세상 사람들은 당황하겠지만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래 기다렸다가 만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오늘을 다르게 살아갑니다. 더 담대하고, 더 이타적이며, 더 기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