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 1:23)
1953년 봄,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 세상은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두 사람이 나중에 고백한 것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산이 우리를 통과시켜 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올라갔지만,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통과시켜 준 것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에베소서 1장은 집요하게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이 바로 이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입니다.
바울은 그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장면을 제시합니다. 부활, 왕권, 그리고 교회입니다. 이 세 장면을 차례로 들여다보면, 우리가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무덤 입구에는 큰 돌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고, 무엇보다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일방통행입니다.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부활을 이야기할 때 주목할 만한 언어 습관이 있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나셨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일으키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지 않으셨을까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문장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것이다." 권세는 있었지만, 명령에 따라 그 권세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스스로의 신적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살아나시지"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 채로 그 무덤 속에 누워 계셨습니다.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능력이 임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의 예고편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아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무 조건도, 아무 소원도, 아무 깨우침도 없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먼저 일으키셨습니다. 부활은 그 능력의 이름인 것입니다.
서울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한 침대에는 임종을 앞둔 노인이 누워 있고, 다른 침대에는 방금 태어난 신생아가 있습니다. 한 공간에 죽어가는 삶과 시작되는 삶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기묘한 장면이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두 세대' 개념을 빌려와 이것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두 개의 시대로 나눴습니다. 지금 이 세대와, 메시아가 오셔서 시작될 오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가 완전히 끝나야 다음 세대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두 세대가 겹치기 시작했다고 선언합니다.
오는 세대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살 사람들이 벌써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이 낡은 세대에 속한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미 오는 세대의 생명을 내면에 품고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것과 같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겉은 평범한 흙그릇이지만, 안에 담긴 것은 천국의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역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역사 전체의 두루마리, 그 인을 뗄 자격이 있는 자를 찾는 장면입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땅 아래서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이 울었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립니다. "울지 마라.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겼다." 그리고 보좌 앞에 어린양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이 역사의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딘가에서 전쟁이 나도, 경제가 흔들려도, 팬데믹이 와도,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곧 하늘의 모든 존재들까지도 그 앞에 복종합니다. 바울이 굳이 '천사'라는 간단한 단어 대신 이 장엄한 명칭들을 나열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사의 이름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 위에 계신 분의 영광이 더 크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이신 분이 인성을 가지고 그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 인간의 몸을 벗어두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구유에 누우셨던 그 몸, 목수 일을 하셨던 그 손, 배반당하고 채찍 맞으셨던 그 몸을 변화된 형태로 입으신 채,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은 약속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창세기 2장에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독수리, 사자, 고래, 개미... 아담은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긴 행렬이 끝났을 때, 아담의 짝이 될 존재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때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단순한 조력자, 즉 돌봄이가 아닙니다. 그 단어의 정확한 뉘앙스는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없으면 나는 완전하지 않은 자다.' 말하자면, 하와 없는 아담은 반쪽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이 창세기의 장면을 그대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뼈입니다. 그분의 갈빗대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 없이는 완전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말의 무게를 느껴보십시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 모든 정사와 권세가 그 앞에 무릎 꿇는 분이, 우리를 자신의 충만으로 요구하십니다. 우리 없이는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구절을 두고 신학자들은 오래 논쟁했습니다. '충만'을 능동적으로 읽을 것인가, 수동적으로 읽을 것인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인가, 그리스도가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시는가. 칼빈과 핸드릭슨은 전자를, 스토트와 로이드-존스는 후자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뗄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처럼, 머리와 몸처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을 만물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그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역사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니 나는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은 경건하게 들리지만 실은 위험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면, 사람의 몸에서 뇌는 모든 명령의 중추입니다. 손가락을 움직이라는 명령도, 심장을 뛰게 하는 신호도, 다 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뇌의 명령이 아무리 강해도, 근육이 없으면 그 명령은 수행되지 않습니다. 뇌에서 '20kg을 들어라'는 신호가 내려가도, 근육이 10kg도 못 버티는 상태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머리의 명령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수행할 우리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단련되는 것, 말씀을 배우며 힘을 키우는 것,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것, 이 모든 것이 근육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단련된 근육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결실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것은 농부가 해야 합니다. 비가 부족하면 부지런히 물을 대야 합니다. 가을이 되면 낫을 들고 나가 거두어야 합니다. 씨도, 비도, 흙도, 열매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은 농부의 몫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당연히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도 뻔뻔하게 다시 일어나서 해보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그 땅에 사는 일곱 족속을 완전히 몰아내라. 타협하지 말라. 남겨두지 말라." 가혹하게 들리는 이 명령은, 사실 영적인 선언입니다. "너희는 이제 죄악의 원리와 단절하라. 이 세상의 방식과 타협하지 말라. 너희는 내 백성이니 내 백성답게 살라." 그런데 이스라엘은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아낙 사람들을 조금 남겼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결과를 역사가 기록합니다. 가사에서 블레셋이 삼손을 죽였습니다. 가드에서 골리앗이 나왔습니다. 아스돗에서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남겨둔 것들이, 결국 가장 큰 상처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된 분노, 정리되지 않은 탐욕, 습관처럼 굳어진 작은 거짓말,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정도는 다들 그러잖아'라고 합리화하며 남겨둔 것들이 언젠가 우리를 삼킵니다. 누룩처럼 조용히 번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대단한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의인인 롯의 아내였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곁에서 지켜봤고, 천사의 손에 이끌려 소돔을 빠져나와 구원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알이 거의 다 보일 무렵, 여느 때처럼 해가 떴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싹텄습니다. '정말 소돔이 멸망할까?' 두고 온 것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소돔에서의 익숙하고 달콤했던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한 순간에, 거기까지 달려온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가, 성경을 많이 배웠는가, 훌륭한 믿음의 가족이 있는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자동으로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소돔을 향한 미련을 끊어내고 있는가입니다. 지금 옛 것과 싸우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신 것 앞에서, 아무 일 없을 것처럼 해가 뜨고 있어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살길인 것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의족을 달고, 수없이 넘어지면서,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이끈 것은 정상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정상이 없다면 한 발짝도 내디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에베소서 1장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정상이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정상에 속한 자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는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낡은 세대에 몸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그분의 몸입니다. 그분이 왕 노릇하시는 나라의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 신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롬 8장 17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난을 통과하며 근육을 키우고, 말씀으로 힘을 쌓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며, 남겨둔 죄의 불씨를 찾아내어 끊어내고, 소돔을 향한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 달리는 것, 이것이 왕의 신분에 맞는 삶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 열심 때문에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에 법궤가 없는 것은, 그 법궤가 이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말씀으로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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