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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23) - 인간과 죄, 우리가 서 있던 자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어느 해 겨울, 어떤 사람이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이 웃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매일 저녁 맥주컵에 소주를 반 병씩 부어 마시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것이 하루의 마감이었고, 그것이 없으면 하루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자유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일 밤, 어김없이 그 술잔에 묶여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어떻게 건져내셨는가?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하버드에 보내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 아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TV와 게임에만 빠져 삽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 곁에 와서 조용히 말합니다. "
아버지는 네가 하버드에 가길 원하는데… 다 내 잘못이지." 그러더니 자기 눈알을 뽑았습니다. 아들은 충격을 받아 잠시 공부를 했지만, 그 충격이 가시자 다시 게임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기 귀를 잘랐습니다. 그 아들은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반드시 나를 하버드에 보내고야 말 것이다.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저분은 더 무서운 것을 꺼내 드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집념과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낮은 자리에 있었는지를 그립니다. 높이를 실감하려면 먼저 깊이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중간 어딘가에서 태어난다고, 환경이 좋으면 선하게, 나쁘면 악하게 된다고, 좋은 교육과 따뜻한 가정과 훌륭한 스승이 있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하게 바뀔 수 있다고,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나쁜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랬다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은 어디였습니까? 에덴이었습니다. 결핍이 없었고, 두려움이 없었고, 하나님이 직접 거니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서 타락했습니다. 환경을 탓할 수 없는 자리에서, 인간은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에덴이 이미 증명했습니다.

동양학을 공부하시던 분의 아버님이 처음으로 예배당에 오셔서 원죄에 관한 설교를 들으시다가 "
거, 개 똥 같은 소리 그만 하쇼" 하고 다시는 발걸음을 안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속으로 "그 어르신 말씀 한번 잘 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은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해, 특히 자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원죄 교리야말로 진리 중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믿기 싫지만, 가장 정확한 진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합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아직 율법도 없던 시대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아무 죄도 지을 수 없었던 갓난아이들도 죽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죄가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였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우리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바울은 3절에서 "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뛰미아'는 강하고 긴박한 갈망을 뜻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전날 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쓰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간절한 소원, 깊은 열망, 그것이 바로 '에피뛰미아'입니다.

그러니까 강한 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것, 졸릴 때 자고 싶은 것, 사랑받고 싶은 것,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것,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쾌락과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복 주시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 가장 기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이 주신 것들을 기뻐하며 누리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문제는 절제입니다. 아니, 절제의 불가능성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자연스러운 욕구를 멈출 줄 모릅니다. 먹는 것이 인간을 끌고 갑니다. 쾌락이 인간을 지배합니다. 어느 도시에서 청소년 범죄를 분석했더니 90% 이상이 유흥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쾌락이 아이들을 끌고 가 결국 범죄의 자리까지 데려간 것입니다. 마약은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마약을 사용하지만, 나중에는 마약이 사람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마약이나 알코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망도 그렇습니다. 비전도 그렇습니다. 명예를 향한 갈망, 지식의 우월감, 새로운 자극을 향한 끊임없는 충동,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오직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으로만 시간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자극, 오늘날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과 커피 중독이 본질적으로 다릅니까? 마약 중독과 일 중독이 다릅니까? 도박 중독과 쇼핑 중독이 다릅니까?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라는 왕을 위해, 절제 없이 치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
'라 규정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당신 안에서 당신을 끌고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죄인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행복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가정의 목표를 '
행복'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그 행복을 채워줄 것을 요구합니다. 상대가 조금만 더 노력해주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행복이 목표가 되면, 행복하지 않은 모든 순간이 실패가 됩니다.

그러나 가정의 목표는 행복이 아닙니다. 순종과 책임입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역할을,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맡아, 이 땅에서 천국을 배우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킬 때, 아내는 순종과 아량과 인내를 배우고, 남편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배웁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군의 아내가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전쟁터에서 그 소식을 들은 장군이 한달음에 달려와 왕 앞에 엎드렸습니다. "
제 아내 대신 제가 죽겠습니다." 고레스 왕은 그 사랑에 감동하여 둘 다 놓아주었습니다. 걸어 나오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까 왕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 자비로운 눈빛을 보셨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오직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단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보다 비교할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못을 박는 원수인 자기 아내를 위해 실제로 죽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3절은 그 모든 것의 결론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
본질상 진노의 자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죄에 대해 결코 눈을 감지 않습니다. 에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고, 이스라엘을 향한 징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은 선명하게 말합니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진노는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미 지금도,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그 진노는 그림자처럼 드리워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따라 행복을 추구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가져도, 더 올라가도, 더 채워도, 그 갈증은 끝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마실수록 더 목마릅니다. 그것이 진노 아래 있는 삶의 실상입니다.

아이언사이드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 시장 어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한 무신론자가 명함을 건네며 도전했습니다. "
불가지론 대 기독교, 공개 토론을 합시다. 비용은 내가 내겠습니다." 아이언사이드 목사님이 그 명함을 회중에게 읽어주고 대답했습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은 불가지론을 믿고 구제불능의 삶에서 변화되어 지금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한 명만 데려오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을 백 명 데려오겠습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습니다. "저도 갈게요!" "우리 구세군에서 40명 보내겠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손사래를 치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변화된 삶은 논증보다 강합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배 위에는 난간이 있고, 갈 수 있는 곳의 한계가 있습니다.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이 자유입니까? 바다 속에는 상어가 있습니다. 건너편 항구에 닿기 위해 배 위에 머무는 것, 선장의 지시에 따르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제한처럼 보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우리를 그 자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리, 욕심이 우리를 끌고 가던 자리, 진노 아래 불안하게 살던 자리, 아들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셔서 하늘 보좌에 앉히신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새 영이 들어왔지만 옛 육체도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등의 연속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싸움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건져졌는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겨 놓으신 싸움에 우리를 함께 참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그 감격을 떠올리십시오. 우리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그리고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신 분의 집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 감격 안에 불평과 고통을 녹이십시오. 우리는 건져진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