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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25) - 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9.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신학교 강의실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
죄에 대해 설교하지 마세요. 3주만 계속하면 교인 절반이 나갑니다." 그 목사님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이내 이렇게 말합니다. "알겠습니다. 충분히 들었어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그러나 그것은 죄 이야기가 듣기 싫다는 말이지, 삶의 방향에 진심으로 관심이 생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 또 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은혜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정직하게 직면한 사람만이 빛의 눈부심을 알 수 있습니다.

"
거듭난 사람도 결국 계속 죄를 짓는다고? 그렇다면 나는 이제 안심하고 살아도 되겠구나."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오해입니다.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죄를 지어도 결국 구원받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선하게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도 바로 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짧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롬 6:2)

이 두 마디 안에 복음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듭난 사람에게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물고기를 땅 위에 던져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물고기의 본래 삶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이 죄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은 그 존재 자체에 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형벌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죄수에게 피해자의 시체를 묶어 놓는 것입니다. 그 죄수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로 묶인 채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를 맡으며, 그 무게를 짊어지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음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바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거듭난 사람에게는 새로운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옛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신이 왕이 되어 살도록 수십 년간 훈련된 인격과 욕망과 습관이 여전히 함께 존재합니다. 이 옛 사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날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웁니다. 그리고 집니다. 또 싸웁니다. 또 집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갈림길이 생깁니다. 죄에 넘어진 후,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자책과 낙담과 수치심 속에 머뭅니다. "
나는 왜 이럴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기는 한 걸까." 그 자책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중심성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를 합리화합니다. "
다들 이렇게 살잖아.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그것은 죄를 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내가 이 모양인데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그 자각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 감사가 삶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또 넘어집니다. 또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이번에는 감사가 조금 더 깊어집니다. 이것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이 변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화는 우리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면서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감사가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실패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를 빚어가는 도구가 됩니다. 실패는 우리 자신의 불가능함을 가르쳐 주고, 그 불가능함이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더 깊이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웅덩이 파는 행위 자체를 ""이라고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목이 마른 것은 당연합니다. 물을 찾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것을 "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칸트는 인간 안의 뻥 뚫린 구멍을 말했고,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권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름은 달라도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온갖 웅덩이를 파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바꾸며 관계 속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종교 안에서 채우려 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고 아방궁을 지으며 권력과 영생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과 명예와 성공과 쾌락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 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그 방법으로 만족했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전혀 다른 고백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지하 묘지, 카타콤에서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언제든 원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가지 않았습니다.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락함도 포기하고, 그 어둠 속에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살게 했을까요? 그것은 어떤 이념이나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 진짜 생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족의 선언이었습니다. 바울은 생애 마지막에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고백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마침표였습니다. 이것이 생수를 마신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로마서 6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병기"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우리의 몸, 눈, 손, 발, 혀, 마음 하나하나가 전쟁터의 무기라는 것입니다. 그 무기는 중립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든지, 죄에게 드려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눈을 드리십시오. 하와가 선악과를 향해 눈길을 멈춘 순간, "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언제나 눈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유혹이 펼쳐져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하나가 무수한 선악과들을 담고 있습니다. 눈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금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지키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발을 드리십시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
나는 거기 가도 괜찮아, 나는 충분히 성숙하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자신감을 경계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피해 달아났을 때, 그는 비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지혜였습니다. 넘어질 자리에는 가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혀를 드리십시오. 야고보서는 혀를 작은 불씨에 비유합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울창한 숲 전체를 태웁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흔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따뜻하게 건넨 말 한마디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혀는 가장 작은 지체이지만, 의의 병기로 드려질 때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마음을 드리십시오. 잠언은 말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모든 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깊이 침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와 근심입니다. 염려는 단순한 걱정이 아닙니다. 염려는 "하나님 없이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해 보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가장 은밀한 형태의 불순종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는 말씀은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납니다.

소극적으로 죄를 피하는 것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비어있는 자리는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집니다. 악을 몰아낸 자리를 선으로 채우지 않으면, 더 강한 악이 돌아옵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랍니다. 어떤 훌륭한 철학도, 어떤 감동적인 문학도, 우리의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영 안으로 들어올 때, 옛 사람은 조금씩 물러납니다. 새사람이 조금씩 앞으로 나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야로, 24시간, 순간순간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사람,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의 초상화입니다.

군대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어느 선수가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을 때, 한 칼럼니스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
만약 내가 군 면제 제의를 받았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나를 지켜주고 내 권익을 보호해 주는 이 나라를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왜 빼앗아 가느냐고." 이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섬김을 의무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의무는 강요입니다. 그러나 감사에서 나오는 섬김은 기회입니다. 나라가 고마운 사람에게 군복무는 빼앗기는 시간이 아니라 드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삶이 의무처럼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은혜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가 진심으로 감사한 사람에게, 선한 삶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수도 없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로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감사가 깊어질수록 삶은 바뀝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눈과 발과 손과 혀와 마음, 그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응답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자유입니다.

"너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