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8~10)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던 1945년 어느 날, 미군은 레마겐의 철교를 무력화하기 위해 상류의 댐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 한 무더기를 터뜨렸지만 댐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실패했다고 낙심한 채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이 남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균열이었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균열은 조금씩 벌어졌고, 결국 댐 전체가 무너지며 철교도 함께 붕괴했습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믿음이 무너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받아들인 작은 왜곡 하나가, 몇 년이 지난 뒤 신앙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믿음의 댐에는, 지금 어떤 금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은 기독교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본질 하나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로 구원이 누구의 손에서 시작되고 누구의 손에서 완성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목회자가 병원 심방을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밤새 자리를 지키던 한 어머니에게 간호사가 "환자분 아드님 되시나요?" 하고 묻자,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낳았어요. 제가 그 아이를 압니다." 단순히 이름과 생년월일을 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의 울음소리, 처음 걸음마를 뗄 때의 뒤뚱거림, 사춘기에 쏟아낸 원망의 말들까지,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롬 8:29)이라 말할 때의 '안다'는 바로 이런 앎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미리 내다보시고, 누가 예수를 믿을지 확인한 다음 그 사람을 택하셨다." 마치 시험 결과를 먼저 보고 합격자 명단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 '안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다"(호 13:5)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서에서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암 3:2)고 하십니다. 이 땅에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앎'은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안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말은, 우리가 훗날 예수를 믿을 것을 미리 확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일까지 감당하셨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배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야곱과 에서, 이 두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롬 9:11).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그들 중 하나를 택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그건 불공평하지 않나요? 적어도 태어나서 살아보고, 선하게 살지 악하게 살지 볼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태어나서 살아본다면, 우리는 정말 선하게 살까요?
어느 교도소 교화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상담사가 재소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까?" 대부분의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나쁜 부모, 나쁜 친구, 나쁜 환경, 자기 자신을 지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를 준다고 해서 선을 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마음이 상실된 채로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롬 1:28).
우리에게 백지 상태에서 선택할 기회를 준다 해도, 우리는 결국 같은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은 바뀌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버리셨는가"가 아니라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셨는가"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사 65:1~2). 하나님은 계속 손을 내미셨지만, 아무도 그 손을 잡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몇몇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붙잡아 주셨습니다(롬 9:15-16). 그것이 불의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실화가 담겨 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군수품 공장을 운영하며 자기 재산을 들여 1,200명이 넘는 유대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한 사업가도, 정직한 남편도, 절제된 인격자도 아니었습니다. 술과 여자와 사치에 빠져 살았고, 나중에는 사업에 몇 번이나 실패하며 몰락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던 날, 그가 구해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반지를 만들어 그에게 건넸습니다. 반지 안쪽에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 훗날 이스라엘은 쉰들러에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쉰들러는 도덕적으로 결코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의롭다"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 반지마저 팔아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칭호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성경이 말하는 '의'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롭다'는 말을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 '의'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성실히 감당했는가를 묻는 말이었습니다. 쉰들러의 사생활이 어떠했든, 그는 자신과 관계 맺은 유대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목숨을 걸고 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보라는 가나안 군대장관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 죽인 야엘의 행동을 "의롭다"고 노래합니다(삿 5:11).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살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편에서 마땅히 하실 일을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마땅히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창조주로서,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순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종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 몫을 대신 감당하셨고, 그 순종을 우리 것으로 넘겨주셨습니다(롬 3:23~24).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착해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이름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 어느 우편배달부가 소포 하나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포장지를 들여다보던 그는 그 종이가 신문지라는 것을 알아챘고, 거기 실린 한 설교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전 목사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배달 도중 길에 서서 그 설교를 다 읽었고, 그 자리에서 회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가 말해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르심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 옵니다. 화려한 웅변도, 놀라운 이적도 아닌, 소포지에 인쇄된 활자 몇 줄로도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아무리 지혜롭고 학식이 높아도, 성령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 말씀은 그저 흘러가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에게는, 신문지 한 조각도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어린아이와 아버지가 사람 많고 위험한 길을 건너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꼭 잡습니다. 그런데 그 "손 꼭 잡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네가 손을 놓으면 나도 놓아버릴 거야"라는 협박일까요? 아버지들은 압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이의 손에 아무리 힘이 빠져도, 심지어 아이가 손을 놓아버리려 해도, 아버지는 자기 손에 더 힘을 줍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그 손을 놓지 않습니다. 길을 건너는 것은 아이지만, 그 아이를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는 힘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옵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고, 마침내 영화롭게 되는 이 모든 여정(롬 8:29~30)은 우리 손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는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이미 과거형으로 선언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일인데도 하나님이 하시기로 한 일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조금 넘어졌다고, 이번 주 다시 같은 죄에 걸려 넘어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전히 죽는 날까지 죄와 씨름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손을 잡고 계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손의 힘이 빠지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손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습니다.
레마겐의 댐을 무너뜨린 것은 처음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작은 균열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치신다"는 이 단순한 진리에 작은 틈 하나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래도 내가 뭔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노력은 보태야 하지 않을까", 그 틈은 서서히 벌어져 결국 은혜라는 댐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진리를 붙들고 있으면, 그것은 어떤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벽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사랑으로 아셨고, 나를 예정하셨고, 말씀으로 나를 부르셨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것으로 삼아 의롭다 하셨고, 이미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아버지의 손을 다시 한번 붙잡으십시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이미 당신의 손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신약 말씀 묵상 > 에베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베소서(26) - 그러나, 복음의 대반전 (0) | 2026.06.23 |
|---|---|
| 에베소서(25) - 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0) | 2026.05.29 |
| 에베소서(24) - 인간이란 무엇인가,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서 (0) | 2026.05.20 |
| 에베소서(23) - 인간과 죄, 우리가 서 있던 자리 (0) | 2026.05.15 |
| 에베소서(22) -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 (0) | 2026.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