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8~10)
몇 해 전,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온 마을 사람들을 다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평판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초청받은 모든 사람에게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미리 지어서 나눠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값을 치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잔치 날 그 옷을 입고 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 날, 한 사람이 자기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나름 신경 써서 차려입은, 결코 남루하지 않은 옷이었습니다.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주인 어른께서 준비하신 예복이 있는데 왜 그 옷을 입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제 옷도 충분히 좋은 옷입니다. 제가 알아서 입고 왔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잔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청을 받았는데, 게다가 자기 옷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쫓겨나야 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직접 하신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 안에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잔치의 예복은 우리가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푸신 분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옷을 입고 가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씨름해야 할 문제, 곧 "자기의"라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지구본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필통에서 30센티미터 플라스틱 자를 꺼내 지구본의 둘레를 재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을 돌려 재도 답이 나오지 않자 아이는 짜증을 내며 말했습니다. "이 지구본은 도대체 크기를 잴 수가 없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 할 때 종종 이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이라는 자는 고작 30센티미터인데,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30만 마일도 넘는 광대함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짧은 자를 들고 하나님을 재려고 하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면 "하나님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해버립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순간들을 만납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의 신하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붙잡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는 법궤를 지키려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처음 이 본문을 읽는 사람은 당혹스러워합니다. "선의로 한 행동인데 왜 죽이셨을까?"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16장에서 이미 법궤를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순결한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께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고압 전류가 흐르는 변전소에 "출입금지, 만지면 감전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표지판을 무시하고 들어간 사람이 감전되었다면, 우리는 전기 회사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경고가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만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이신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모르면, 우리는 결코 은혜의 진짜 크기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그렇게 크고 두려운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다가와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은혜의 높이도 잴 수 없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아내의 마흔 번째 생일을 맞아, 그는 몇 달 전부터 은밀히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근사한 연회장을 빌리고, 아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장식하고, 오랜 친구들을 하나하나 수소문해서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주말에 내 친구 아내의 생일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자." 아내는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화려한 연회장에 들어선 아내는 이 파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감탄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근사한 파티를 받을까?" 그 순간,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아내를 향했습니다. 아내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147편은 하나님이 눈과 서리와 우박까지도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아모스서는 가뭄과 재앙조차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하고 무심히 지나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우주의 모든 질서와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해 정교하게 짜여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현상 하나, 역사의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 하나까지도, 사실은 그 파티의 주인공인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요셉에게는 그것이 인생 최악의 배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결국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교수대에 자기 자신이 매달리게 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락이 발람을 매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오히려 발람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토록 정교하게, 이토록 크게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보태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파티를 통째로 준비한 남편 앞에서, 아내가 굳이 자기 돈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사 와서 "이건 내가 준비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불필요한 일이겠습니까?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굳이 우리의 행위라는 초라한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나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아프고 정직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다윗은 이레 동안 땅에 엎드려 금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신하들이 아무리 일으켜 세우려 해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레째 되던 날,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저렇게 슬퍼하셨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걸 알면 무슨 일을 저지르실지 모른다."
그런데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었습니다. 신하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슬퍼하시더니, 죽고 나니 오히려 일어나 식사를 하십니까?" 다윗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 주실까 해서 울며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내가 다시 울어본들 아이가 돌아오겠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 짧은 대답 속에는 엄청난 신앙의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슬픔이 정당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결정이 옳으시다는 것을 동시에 붙들었습니다. "왜 살려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는 자리로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런 순간이 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두 갈래 길 앞에 섭니다. 하나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하나님은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는 길입니다.
19세기의 변호사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이 두 번째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와 네 딸을 배편으로 유럽에 먼저 보냈는데,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했습니다. 아내는 살아남았지만 네 딸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스패포드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배 위에서, 딸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 위를 지나가며 이런 가사를 썼습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이 찬송은 감정이 없어서 나온 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슬픔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붙든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한 심리학 실험이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벽에 일부러 구멍을 크게 뚫어 놓고, 그 아래에 "절대 들여다보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문구가 없었을 때보다 사람들이 세 배나 더 자주 그 구멍을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저녁 먹고 설거지를 좀 해줘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있는데, 아내가 먼저 "여보, 밥 먹고 설거지 좀 해"라고 말하는 순간, 하고 싶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경험 말입니다. 명령을 받는 순간, 자발적이던 마음이 저항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선을 요구하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육신은 그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이 금지한 것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겠다는 시도는, 마치 구멍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표지판 앞에 선 사람에게 "의지력으로 극복해 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지를 낼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끌려가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문제의 산증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의 실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겉으로 완벽했던 사람이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이릅니다. 왜 자기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가 그토록 심각한 죄일까요? "그래도 열심히 사는 게 뭐가 나쁘냐"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의사가 무료로 완치 수술을 해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몇 가지 민간요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로 해결해 보겠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그 병은 그렇게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라고 설명해도, 환자는 계속 자신의 방법을 고집합니다.
이 환자의 문제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열심이 자신의 병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심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살리려고 찾아온 의사의 호의를 거절하는 행동이 되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열심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낸 열심은, 아무리 진지해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동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로 돌아가 보면, 그 잔치에 쫓겨난 사람의 문제가 더 선명해집니다. 그는 게을러서 옷을 안 입은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옷을 갖춰 입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은 주인이 마련한 옷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옷이었습니다. 아무리 정성 들여 지은 옷이라도, 잔치의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중독"이라는 말을 쉽게 알아듣습니다. 술, 도박, 게임, 쇼핑 중독에 대해서는 다들 익숙합니다. 그런데 종교적 열심도 중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한 성도님이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분은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역예배를 이끌고,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고, 교회 봉사에 늘 앞장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몇 주간 아무 활동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분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내가 이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바로 "자기의"에 붙잡힌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와 안전함을 활동과 성취에서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활동이 멈추는 순간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평안합니다. 그의 안전함은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느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사실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특징은 항상 남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60와트 전구를 가진 사람이 40와트 전구를 가진 사람을 보며 "나는 저 사람보다 밝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태양 앞에 서면 60와트든 40와트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거룩함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자기 의가 다 똑같이 초라할 뿐입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늘 긴장 속에 삽니다. 남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흠 잡히지 말아야 하고, 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붙든 사람에게는 이상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도 "그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 남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높일 필요가 없는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결혼식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잔치에 초청받은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이미 준비된 그 예복을 받아 입는 것뿐입니다. 내 옷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내려놓고, 값없이 주시는 그 옷을 입는 것.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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