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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26) - 그러나, 복음의 대반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3.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4~7)

어떤 사람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말했습니다. "
지금 당장 입원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그런데 환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잡니다." 의사는 난감했습니다. 병이 있는데 본인이 모르니, 치료를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모르면, 구원의 기쁜 소식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 줍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3절까지,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냉정하게 진단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 육체의 욕심대로 살던 자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명심보감이나 노자처럼 도덕적 삶의 지혜를 담은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습니다. "
인간은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인가?" 하나님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뛰어난 민족,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시고 1,500년을 시험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같은 우수한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더라면 달랐을 것"이라는 변명을 차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실패했습니다. 신학자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다고, 잎은 아직 달려 있지만, 이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깊이 아는 학자들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다." 복음은 절망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읽다 보면, 3절과 4절 사이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뒤집힙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어둠입니다. 그런데 4절 첫머리에 단 두 글자가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
호 데" 우리말로 "그러나"입니다. 이 "그러나"가 복음입니다. 헬라어로 복음은 "유앙겔리온"입니다. 접두어 ""는 기쁨을 뜻합니다. 옛날 어느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을 때, 전령이 온 나라를 달리며 외쳤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가리켜 유앙겔리온이라 했습니다. 왕자의 탄생 소식은 온 백성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절망으로 가득 찬 1절부터 3절의 끝에, 하나님께서 "
그러나"를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첫 번째 이유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말에는 자칫 위험한 생각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은 구원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1차 목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을 영원히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통해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의를 자랑하려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속성상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 의로우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한결같이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상태와 무관합니다. 그분은 그분의 성품대로 행하십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런 논리를 펼쳤습니다. "
우리가 신실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빛났다면, 우리가 오히려 잘한 것 아닌가?" 마치 집을 나간 탕자가 "내가 집을 떠난 덕분에 아버지의 인자하심이 드러났으니, 내가 잘한 일"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일침을 가합니다. "그런 자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우심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골고다의 십자가로 나타내셨습니다. 1896년,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 오지를 헤매다 길을 잃었습니다. 며칠째 정글을 헤매던 그는 마침내 현지 안내인을 만났습니다. 안내인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
제가 길을 압니다. 따라오세요." 그런데 그가 안내하는 길은 지도에도 없고, 아무리 보아도 길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탐험가가 물었습니다. "길이 어디 있습니까?" 안내인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걸어가면 그것이 길입니다." 탐험가는 불안했지만 따라갔고, 결국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길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누군가 실제로 걸어간 발자국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막연한 선언으로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아들을 보내셨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으며, 실제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역사 속에 객관적 사실로 박아 놓으셨습니다.
앙리 샤리에르는 자신의 탈옥 경험을 담은 책 《빠삐용》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세 번 탈옥한 죄수의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열 번 넘게 탈옥을 시도하고 성공한 내 이야기는 더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다소 엉뚱한 비유이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객관적 사실은 막연한 느낌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뜨거운 감동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만으로 신앙을 붙들려 하면, 감동이 식을 때마다 신앙도 함께 흔들립니다. 어제는 은혜가 충만했다가, 오늘은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느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내 기분이 아무리 가라앉아도, 그 십자가는 뽑혔다 다시 꽂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 한 번, 역사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자신의 의로우심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바로 우리를 통해서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의 "
오는 여러 세대"는 헬라어로 "아이오신 에페르코메노이스", 영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영원히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려 합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평양의 한 교회에 아주 악명 높은 깡패가 있었습니다. 온 동네가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처음에 동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
저 인간이 변할 리 없어."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정말로 달라졌습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변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 같아." 그의 변화된 삶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며 "어떻게 저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지?"라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증거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삶이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바울은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입니다. "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하늘의 부요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함을 비우고, 이 땅에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거두었을 때,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선언하셨습니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만나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습니다.

빌레몬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바울이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씁니다. "
그가 빚진 것이 있거든 다 내게로 돌리라." 이것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들어 던지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가 되어 나서셨습니다. "저들의 모든 빚을 내가 갚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욕심이 채워지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 방향입니다.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런 계산을 합니다. '
나는 이만큼 했는데, 저 사람은 왜 저만큼만 하고 칭찬을 받지?' 절대 밑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형제를 위해 시간을 밑지고, 물질을 밑지고, 손해를 감수하는 삶,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핵심입니다.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포를 행하지 않고, 입에 궤사가 없으며,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리고 상한 그분의 모습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드실지 모릅니다. '
나는 도저히 그런 삶을 살 수 없는데.' 맞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삶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조각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영광은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훌륭한 작품이 나올수록 조각가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만드는 것은 조각가이지, 돌멩이가 아닙니다. 돌멩이가 조각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조각가의 손에 자신을 맡기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삶을 만들어 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4장 23절은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오는 "이끌다"는 헬라어 "헬퀴오"는 순순히 따라오는 사람을 안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항하는 자를 강제로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코뚜레를 꿰어서라도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어느 노련한 도예가가 제자에게 물레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흙을 올려놓고 힘껏 주무르면 주무를수록 흙은 이리 밀리고 저리 튀어 도무지 모양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지쳐서 물었습니다.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예가가 말했습니다. "흙이 스스로 모양을 만들려고 버티면 버틸수록 더 망가집니다. 힘을 빼고 제 손에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힘을 빼고 맡길 때,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작품을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마땅히 지옥에 던져져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다. 그 의는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고, 이제는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세토록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우리의 모든 빚을 대신 갚으신 그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 하늘에 앉히신 그분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그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
헬퀴오", 끝까지 끌고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묵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길로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에베소서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