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파리 외곽의 어느 대학 강의실, 한 철학 교수가 첫 수업 첫 마디를 이렇게 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인간에 대해 공부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이것을 가르쳐 왔지만, 아직도 인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학생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졸업할 때쯤 되면, 여러분도 그걸 알게 될 겁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인류 지성사의 솔직한 자화상입니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인간을 정의하려 했습니다. 플라톤은 "이성적 동물"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근대에 와서 마르크스는 "사회구조의 산물"이라 했고, 스키너는 "환경이 빚어낸 반응 기계"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의도 인간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물을 손바닥으로 퍼 담으려는 것처럼, 인간은 그 모든 정의의 틈새로 새어 나갔습니다.
파스칼이 《팡세》에 남긴 말은 그래서 더 진실하게 들립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진기한가! 만물의 심판자이면서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면서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면서 동시에 수치." 이 역설이 인간입니다. 숭고하면서도 비루하고, 위대하면서도 처참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철학은 이 역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물음에 답합니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말입니다.
어느 미술관에 정교한 복사화 한 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완벽했습니다. 색감도, 붓 터치도, 구도도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보면 이것이 원본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원본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원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 모양은 "데무쓰"입니다. 첼렘은 '자르고 베어 만들다'는 뜻이고, 데무쓰는 '무엇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정밀하게 깎아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이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된 것과 달리, 인간만은 하나님을 원본으로 삼아 지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두 층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조적 형상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역량의 총체입니다.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능력, 도덕적으로 감응하는 능력, 타인과 교제하는 능력,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하는 능력, 선택하고 결단하는 능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이성을, 인간의 도덕 감각은 하나님의 거룩을, 인간의 사회성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를 희미하게나마 비추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능적 형상입니다. 그 역량들이 실제로 올바르게 작동하는 상태, 곧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입니다. 독수리의 날개가 구조적 형상이라면, 실제로 하늘을 나는 것이 기능적 형상입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면, 그것은 독수리답지 않습니다. 창조 당시 인간은 이 두 형상을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을 선하게 다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완성된 결정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발적 순종을 통해 더 깊은 성숙으로 나아가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 시험이 선악과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데는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의심, 수치심, 그리고 교만입니다. 이 셋이 차례로 들어오면, 가장 건강한 사람도 무너집니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온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먼저 의심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한 마디가 하와의 마음에 균열을 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자 하와의 대답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또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의 마음속에서 희석되고 있습니다. 분노와 불신이 슬며시 들어온 것입니다.
뱀은 여기서 결정타를 날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평범했던 나무 열매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더라." 욕망이 시야를 뒤틀면, 금지된 것이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인간은 수치심으로 압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생식기를 가렸습니다. 생명이 잉태되는 바로 그 원천,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샘이 오염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 타락이었습니다.
수치심 다음에는 두려움이 왔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존재가 이제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그리고 책임 회피가 찾아왔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탓했고, 하와는 뱀을 탓했습니다. 인간의 그 오래된 버릇, 자기 잘못을 다른 곳에 떠넘기는 습관이 바로 그날 에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은 에덴의 왕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와의 허물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와를 방패막이로 삼았습니다.
훗날, 또 다른 동산 곁에서 또 다른 아침이 밝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왔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동산에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분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습니다(요 20:15). 요한이 일부러 '동산지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첫 번째 동산의 지기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두 번째 동산지기이신 예수님께서 죽어야 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그 모든 실패를 회복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창 9:6). 야고보서에서도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완료분사 "게고노타스"가 이를 증명합니다. 과거에 지음을 받았으며, 그 결과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능적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상실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정교한 시계가 있었습니다. 태엽도 그대로이고 톱니바퀴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어딘가 핵심 부품이 뒤틀리면서 시계는 엉뚱한 시각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구조는 남아 있지만, 기능이 망가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주어진 능력은 이제 우상을 만드는 데 쓰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깎았고, 현대인들은 돈, 명예, 자식, 쾌락,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던 바로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찬양합니다. 이웃과 교제하도록 주어진 사회적 능력은 이제 타인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데 쓰입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심리,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감정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된 결과입니다. 자연을 보살피고 다스리도록 주어진 통치 능력은 이제 자연을 착취하는 데 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반역의 언어를 기억하십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리라, 내가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사 14:13~14)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리라"입니다. 그 교만의 씨앗이 인간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로부터 수억의 인간이 "내가 하리라"는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간결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죄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것, 그 행위뿐 아니라 마음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에덴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아담의 죄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됩니까?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7장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자기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가 그 일이 있고 180년 후에 태어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레위도 아브라함 안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입니다(히 7:9~10).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대표자 안에서 이미 그 행위에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연대의 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이 이것을 선명하게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이 우리의 대표였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가 되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의인이 됩니다.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원리가 우리를 망하게도 하지만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죄의 보편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어떤 사람들은 죄의 경중을 따집니다. "나는 살인은 안 했으니 살인자보다는 낫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는 그 비교가 의미를 잃습니다. 골수 이식 환자를 넣어두는 무균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진 환자에게는 아무리 작은 세균도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무균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균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죄의 구분이 없습니다. 죄는 죄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선행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때로 놀라운 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 선행의 동기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자기 만족, 자기 명예, 자기 안위. 타락한 인간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요 8:34).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이 진노를 우리의 분노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분노는 감정이 상해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본성의 필연적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셔서 화가 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셔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기도하시던 장면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토록 두려워하셨던 그 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모든 죄인들 위에 그 진노가 쏟아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반 은총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인간 안에 양심을 남겨두셔서 최소한의 억제력을 두셨고, 사회법과 통치자를 세워 무질서를 막으셨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다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벧후 3:9).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인간을 쫓아내신 것도 사실은 긍휼이었습니다. 만약 그 망가진 상태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면, 인간은 그 저주받은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른 그 길을 막으시고, 회복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심판 속에도 구원을 숨겨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형상을 완전하게 소유하신 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히브리서 1장 3절의 "카락테르"는 동전을 찍어내는 도장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 땅에 정확하게 복사해 내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의 중심부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면,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심장은 사랑입니다. 불순종과 교만이 형상 왜곡의 열매였다면, 회복된 형상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로마서 8장 29절에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죄로 망가진 그 복사화를 원본처럼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의 문법이 이 진리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은 부정과거, 즉 과거에 단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은 현재분사, 즉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거룩한 자로 선언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언된 실재를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어떤 농부가 좋은 씨앗을 땅에 심었습니다. 심는 것은 단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라는 것은 매일매일의 일입니다. 물을 주고, 햇빛을 받게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합니다. 농부가 심어주신 씨앗을 우리가 자라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2~13절의 역설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나 동시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레일을 깔아주십니다. 그러나 기차는 달려야 합니다.
18세기 미국,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의 물결이 교회를 위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코네티컷 엔필드의 작은 교회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는 지독한 근시여서 원고를 코앞에 들고 거의 읽다시피 했습니다. 특별한 몸짓도 없었고, 우렁찬 목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청중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지금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강대상 옆에 앉아 있던 목사가 에드워즈의 바지를 붙들고 외쳤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보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죄였습니다.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죄의 실체입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이 집회 도중 갑자기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어떤 이로부터 100원을 착복한 일을 고백하셨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회중 전체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통곡했습니다. 한국의 대각성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영적 대각성은 언제나 죄의 자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 없이는 복음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알아야, 그 타락으로부터 건져주신 은혜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병이 심한 줄 모르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마치 약을 먹으면 약효가 나타나듯이,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면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것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복사화가 아무리 정교해도, 전문가는 압니다. 왜냐하면 원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본과 비교하면 차이가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복사화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심하게 훼손된 복사화입니다. 색이 바래고, 찢겨지고, 군데군데 낙서가 되어버린 복사화입니다. 그러나 원본이 살아 계십니다. 그 원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회복의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원본 자신이 직접 오시는 것, 훼손된 복사화를 위해 원본이 찢기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던 자를 살리셨습니다. 훼손된 복사화를 원본처럼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최종 선언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복사화입니까?
'신약 말씀 묵상 > 에베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베소서(23) - 인간과 죄, 우리가 서 있던 자리 (0) | 2026.05.15 |
|---|---|
| 에베소서(22) -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 (0) | 2026.05.06 |
| 에베소서(21) - 능력에서 능력으로 (0) | 2026.05.02 |
| 에베소서(20) - 크도다! 하나님의 능력 (0) | 2026.03.19 |
| 에베소서(19) - 우리의 상속,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1) | 2026.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