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심한 복통을 앓았습니다. 처음에는 소화제를 먹었습니다. 그것이 듣지 않자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진통제가 듣는 동안은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약기운이 떨어지면 통증은 더 심하게 돌아왔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버티던 그는 마침내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습니다. "수술해야 합니다." "그냥 약으로는 안 됩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수술은 고통스러웠습니다. 메스가 살을 가르는 것은 약을 삼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술이 끝난 후, 그는 처음으로 진짜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통제는 그를 편하게 해주었지만, 낫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을 여는 방식이 꼭 이와 같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진통제를 주지 않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을 말하기 전에, 먼저 차갑고 날카로운 메스를 듭니다. "너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직시하라." 그것이 2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왜 이렇게 시작합니까? 우리가 건져진 곳의 깊이를 알지 못하면, 구원의 높이를 결코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은혜의 무게도 느끼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은 특이한 방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주어도 없고 동사도 없습니다. 문장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시작됩니다. 마치 어두운 무대 위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장면만 조명으로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처참한 상태를 먼저 보여줍니다.
그러다 4절에 가서야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5절에 비로소 동사가 터져 나옵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앉히셨다." 이것은 사도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극적 구조입니다. 절망의 밑바닥을 먼저 충분히 보여준 후, 그 한복판에 하나님이 걸어 들어오시는 장면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 순서가 바뀌면 복음의 감격도 사라집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이 2장의 첫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이 죽은 자들이 아주 바쁩니다. 세상 풍속을 따르고, 욕심을 좇고,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갑니다. 죽었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한 과학자의 연구가 흥미로운 단서를 줍니다. 그는 인간의 노화를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세포에 생명력을 주는 산소가, 동시에 세포를 서서히 노화시키는 바로 그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한다는 역설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한 궤도 위에 올라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바로 이 메커니즘입니다. 아직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웃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목적지가 없거나, 있다 해도 하나님과 무관한 곳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정보를 습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안다"는 것은 부부 사이처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말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과 그런 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는 것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아직 살아 있지만 죽어 있습니다. 움직이지만 방향이 없습니다. 바쁘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받기 전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도는 인간이 왜 이 상태에 빠졌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삼중의 지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포위는 세상의 원리입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여기서 "풍속"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이온'은 "시대, 세대"를 뜻합니다. 세상은 단순히 땅덩어리나 사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이고 정신입니다. 하나님 없이 작동하는 사고방식, 하나님을 배제한 삶의 방식 전체가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조용히, 그러나 철저하게 사람을 지배합니다. 어떤 옷이 좋아 보이고 어떤 직업이 성공이고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를 세상이 먼저 정해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준을 내면화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살면서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의 원리가 그들 안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전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멕시코 깊은 숲속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사틀란에서도 차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그 마을에는 마야의 후예들이 외부 문명과 거의 단절된 채 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바다에 뛰어들어 창으로 물고기를 잡았고, 과일이 먹고 싶으면 나무에 올라가 따 먹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경쟁이 없었고, 그 자리에 따뜻한 인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던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도시에서 365일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 년에 고작 며칠 휴가를 내서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저런 곳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의 삶을 뒤처진 것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을 간절히 동경합니다. 문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더 바쁘고 더 불안하고 더 외롭게 만들었습니까? 세상의 원리는 이렇게 교묘합니다. 사람들을 뺑뺑이 돌리면서도 그것이 진보이고 성공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안에서 진정한 쉼을 찾지 못합니다.
두 번째 포위는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사도는 세상의 배후에 인격적인 존재가 있음을 말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곧 사탄입니다. "역사하는 영"에서 "역사한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능력 있게, 효과적으로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소극적 개념이 아닙니다. 사탄은 적극적으로, 전략적으로, 에너지를 가지고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가장 정교한 전략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하며 달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사탄은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이제 그는 풍요로, 번영으로,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종교에서 벗어나라. 그것이 자유다"라고 속삭이며, 사실은 더 깊은 종속 속으로 인간을 끌어들입니다.
무신론자였던 철학자 조드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목격한 후 회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하는 악의 원리가 없다면, 이 전쟁을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거기에는 분명히 마귀적인 세력이 있었다."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광기는 단순히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언가가 인간을 그 방향으로 몰아갔습니다.
나방은 불빛을 향해 날아갑니다. 빛이 닿는 쪽 근육이 수축하면서 자연스럽게 불 쪽으로 몸이 기울어집니다. 저항하지 않습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날아갑니다. 그리고 불에 탑니다. 사탄의 원리 아래 있는 인간이 꼭 이와 같습니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오히려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파멸을 향해 날아갑니다.
세 번째 포위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사도는 3절에서 "우리도 다"라고 씁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도, 심지어 사도 자신도 포함됩니다. 외부의 지배(세상과 사탄)만이 아니라 내부의 지배도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인간을 안에서부터 조종합니다. 이 세 겹의 포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밖에서는 세상과 사탄이, 안에서는 육체의 욕심이 인간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은 지금 진화하는 중이다. 아직 완전하지 않을 뿐이고, 시간이 지나고 교육이 쌓이면 인류는 점점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낙관주의를 비웃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이성과 문명의 개화를 선언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 인류는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한 대량 학살을 경험했습니다. 독가스, 수용소, 핵폭탄, 더 발달한 기술은 더 효율적인 죽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해도 자살률은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요로운 나라에서 외로움과 절망이 더 깊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공허해지고, 더 자유로워질수록 더 방향을 잃습니다. 왜 교육하고 훈련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진단입니다. 정확한 진단만이 올바른 치료를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의 철학은 계속 진통제를 줍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교육이 답이라고, 더 많은 자유가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메스를 들고 정확히 환부를 찾아갑니다. "네 문제는 여기 있다. 그리고 너는 스스로 그것을 고칠 수 없다." 그 고통스러운 진실 앞에 인간이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달음박질을 강제로 멈추십니다. 사업이 무너집니다. 건강을 잃습니다. 관계가 깨집니다. 뜻밖의 상실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 쉬지 않고 달려가던 사람이 처음으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쫓아가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 속도 속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봅니다. 성경은 그것을 재앙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복이라 부릅니다. 그 멈춤 속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질문을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질문이 하나님을 향해 열린 문입니다.
구원의 크기를 측량하려면 우리가 이 2장 1~3절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식었다면, 은혜가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예배가 형식이 되어버렸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건져졌는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사탄과 육체의 욕심이라는 세 겹의 포위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채 죽어 있던 그 자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냥 살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그 은혜의 크기를 측량하려면, 먼저 우리가 빠져 있던 구덩이의 깊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 깊이를 정직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그때 찬양이 다시 살아납니다. 감사가 되살아납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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