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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20) - 크도다! 하나님의 능력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9.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 1:15~23)

어느 시골 교회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새벽마다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 무릎을 꿇고, 예배가 끝나면 제일 마지막에 일어났습니다. 누가 봐도 열심 있는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년에 이런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평생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살았어요. 혹시 내가 덜 하면 하나님이 날 버리실까봐 늘 무서웠거든요." 수십 년을 예배당에 다니셨지만, 그분의 신앙 안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대신, 언제든 취소될 수 있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교회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교양 삼아, 어떤 이는 부적처럼 안심을 얻으려고, 어떤 이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내 삶에 지금 어떤 능력이 작동하고 있는지,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더 많이 헌신하게 해달라"거나 "더 많이 봉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옵소서."

기도의 핵심은 앎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 백성이 열심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하셨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열심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만큼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병이 낫는 것, 사업이 잘 되는 것, 혹은 기도하다가 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신비한 체험, 대부분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절에서도 스님이 안수하여 병이 낫는 일이 일어납니다. 방언과 예언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의지력 하나로 마약을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더 부유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사탄도 흉내 낼 수 있고,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얻을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란 말입니까?

에베소서 1장 19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사도 바울 자신도 이 능력을 단어 하나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 다른 세 단어를 한꺼번에 씁니다. 뒤나미스, 크라토스, 이스퀴스, 전부 힘과 능력을 뜻하는 단어인데, 그중 이스퀴스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전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앞에
"휘페르발론 메게또스", '위대함을 훨씬 능가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는 능력입니다.

이사야 40장이 묘사하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온 바다를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리시고, 하늘을 뼘으로 재시는 분, 열방은 그분 앞에서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에 불과하고, 땅의 모든 사람은 메뚜기와 같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고,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피곤을 모르시고 지칠 줄 모르시는 분. 바로 그분의 능력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경이로운 것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19절의
"역사하심"으로 번역된 에네르게이아는 잠자고 있는 잠재적 능력이 아니라 지금 활발히 움직이는 작업능력입니다. 영어 단어 에너지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 안에서 지금 이 순간도 에너지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능력입니까? 사도는 20절에서 그 예를 드는데, 놀랍게도 홍해를 가른 것도, 천지를 창조한 것도 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로 듭니다.

왜일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은 천지창조도, 노아의 홍수도,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아닙니다. 바로 죄인인 당신과 나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완벽한 환경이 주어졌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스스로는 영적인 것을 분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인 성경이 말하는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렘 17:9)이라고 했고,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했습니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수면 위에서 누군가 아무리 "손을 내밀어라, 잡아주겠다"고 외쳐도, 그는 이미 움직일 수 없습니다. 숨을 쉬지 못합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죽은 자를 건지기로 하셨습니다.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하실 모든 백성을 그 아들 안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우리 모두의 죄를 전가하시고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아들의 완전한 삶, 하나님이 완벽히 만족하신 그 삶을 우리의 것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위대함을 훨씬 능가하는 그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 구원이 확실하다면, 왜 나는 이렇게 자꾸 흔들리는 것일까?" 어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 중에는 은혜를 받겠는데, 집에만 가면 다시 예전 사람이 돼요. 이래도 구원받은 게 맞는 건가요?"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꼴을 볼 때 흔들립니다. 부르심의 소망도 알고 영광스러운 상속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사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거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구원받은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그 불안을 잠재우려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엄격하게 금식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보태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잠시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무리한 종교 행위를 강요하는 교회가 오히려 부흥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행위로 덮으며 잠시 위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확신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원에 인간의 역할도 있다"는, 성경이 단호히 거부하는 신인 협력설로 흘러가는 길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의 뿌리는 내 열심도, 내 체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아는 데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 안에서 죽어 있던 나를 건지기 위해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이 정도 실패했다고 나를 버리시겠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신 분이, 내 못된 습관 하나를 못 고치시겠습니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 1:6)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능력이 당신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그 능력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있습니다. 나태함, 게으름, 분노, 쉽게 타협하는 마음, 이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공략합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유다서는 천사장 미가엘도 사탄과 맞서다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고 물러섰다고 기록합니다(유 1:9).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엡 6:12).

사탄의 공략은 폭력적이고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방식입니다. 그는 진리를 조금씩 비틉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는 인정하되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구원에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독교의 핵심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네" 하는 반응을 보이며 진리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갑니다.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 24). 우리만 이런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탄식 뒤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방법은 하나입니다. 내 안에 있는 능력의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포르노 중독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끊으려 할수록 더 깊이 빠졌고, 그 죄책감에 스스로를 성도가 아니라고 단정 짓고 교회를 떠나려 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가 그 습관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안다. 그런데 그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이미 자네 안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분이 계신다는 뜻이네. 시체는 자기 상태에 괴로워하지 않아." 그 말이 그 청년을 돌려세웠습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무릎을 꿇을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소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를 향한 소원이 우리 안에 생길 때,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속삭이시는 것입니다. 성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팔다리를 움직여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합니다.

어느 날 기적처럼 나태함이 사라지고 악한 습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안에서 일하시는 그 능력을 신뢰하면서 내가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의 크심을 아는 사람은 "그래, 해보자" 하고 일어서고, 모르는 사람은 "난 안 돼"라며 주저앉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엉터리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셨습니다.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잔인하게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사울을 가장 인자한 목회자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그 동일한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구원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감탄해야 합니다.
"이런 나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만드신다니, 그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이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느니라.'(고후 12:10) 나의 약함이 드러나는 그 자리가 오히려 그분의 강하심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지금 요만큼 자란 이 모습도 전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어르고 달래시며, 때로는 징계를 동원하시면서 나를 만들어 가실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여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이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살아낼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우리는 사망에서 건짐 받은 자들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자들이 가난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암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죄가 불편해졌습니까? 어떻게 지옥이 무서워졌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그 위대한 능력이 당신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신 바로 그 능력이,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을 그 자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신비한 체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완성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