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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티끌로 지어진 존재, 그러나 결코 우연이 아닌 인생 -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자리에 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7.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한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는 삼백 페이지짜리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 이미 마지막 문장을 알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그들이 겪을 시련, 그들이 만나게 될 사람들, 심지어 배신당하는 순간과 화해하는 순간까지도 작가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어떨까요? 그는 자신이 왜 그 골목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왜 하필 그날 비가 왔는지, 왜 하필 그 편지가 그때 도착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그러나 독자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깨닫는 것은, 그 모든 우연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사실은 작가의 정교한 설계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우연처럼, 선택처럼, 때로는 억울한 사고처럼 겪어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결말을 알고 계시며, 그 결말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페이지를 넘겨 가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매일 아침 우주를 내려다보시며 "
오늘은 뭘 좀 바꿔볼까" 고민하시는 모습 말입니다. 어제는 이 나라를 흥하게 하려 했는데 오늘 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계획을 세우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원대로"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한 건축가가 백 층짜리 빌딩을 설계합니다. 설계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기초 공사를 하는 인부는 그 설계도의 전체 그림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오늘 맡겨진 구간의 콘크리트를 붓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위치에 철근을 박아야 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그린 건축가는 이미 백 층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그 건물의 모든 배관과 배선까지 계획해 두었습니다. 인부의 오늘 하루 노동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어도, 그것은 이미 완성된 설계 안에 있는 한 조각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조차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1:20)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타락도, 그리고 그 타락을 치유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도, 이미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 자체가 종착역이 아닙니다. 창조는 어떤 목적지를 향한 첫 페이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오해에 빠집니다. "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내가 너무 예뻐서" 창조하셨다는 식의 감상적인 신앙 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사43:25) 이 구절은 처음 들으면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 때문이라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진리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폭풍우 치는 밤길을 걷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만약 그 아버지가 딸을 붙잡은 이유가 순전히
"딸이 사랑스러워서"라는 감정에만 근거한다면, 그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 딸이 말을 안 듣거나, 아버지가 지치고 힘든 날, 그 손은 놓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나는 아버지다. 아버지로서 내 이름과 책임을 걸고 이 아이를 반드시 지켜낸다"는 마음으로 손을 잡고 있다면, 그 붙잡음은 감정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키시는 이유가 우리의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이름과 영광 때문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 구원의 견고함을 보증해줍니다. 우리의 자격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진리 앞에서 인간의 자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시39:5) 히브리어로 인간이 지음 받은 재료인 "티끌"(아파르)은 우리가 생각하는 먼지보다 훨씬 초라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저주받은 뱀이 평생 먹어야 했던 바로 그 티끌입니다. 그 정도로 보잘것없는 재료로 지어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보잘것없는 존재를 붙드시고 그 안에 당신의 형상을 새기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는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그분의 백성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네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장면 하나: 죽은 자를 살리심. 한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 이미 숨이 끊어진 채 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손을 흔들어 구조를 요청할 수도, 헤엄쳐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가 살아나려면 전적으로 밖에서 누군가 뛰어들어 그를 건져내고, 인공호흡을 하고,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거듭남은 완전한 수동형입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겠다고 결심할 수 없듯이,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우리는 스스로 거듭나기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소생시키셨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장면 둘: 마음의 간절함까지 채우심. 디도라는 인물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간절함이 디도의 마음속에도 똑같이 심어졌다고 말하며 이렇게 감사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후8:16) 우리는 종종 신앙의 열심이나 간절함을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간절함마저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 부어 넣으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역시 우리가 스스로 맺어낸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친히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장면 셋: 평생을 이끄심. 에베소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여기 "예비하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 에토이마조, "미리 정해두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방을 꾸미고, 옷을 준비하고, 학교까지 알아보아 두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가 걸어갈 선한 일들을 미리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니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16:9)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실제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룬 선한 일에 대해 스스로 자랑할 근거가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장면 넷: 끝까지 보호하심.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시37:28) 베드로전서는 이 보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벧전1:5) 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붐비는 시장 골목을 걷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사탕 가게 진열장에 정신이 팔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얼마나 꽉 쥐고 있느냐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의 손을 얼마나 굳게 붙들고 있느냐가 안전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견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그렇다면 택함받지 못한 사람들, 특히 악한 의도를 품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예화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처음에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팔아넘기려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이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창37:18) 만약 이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애굽의 총리 요셉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그 씨앗을 보존받지 못했을 것이고, 훗날 출애굽도, 모세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계보에서 나오실 그리스도의 길도 막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창37:21) 르우벤의 개입으로 요셉은 죽음을 면했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창37:27) 형제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형들의 살의도, 르우벤의 망설임도, 유다의 타협도, 그 모든 인간적 결정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였을 때, 하나님은 그랄 왕 아비멜렉의 마음을 움직여 그가 사라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20:6). 나일강에 버려진 히브리 아기를 애굽 공주가 거두어 왕자로 기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수를 맹세했던 에서가 이십 년 만에 야곱을 만나던 그 순간, 그의 마음을 돌이켜 형제를 끌어안고 입 맞추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있던 다니엘을 향해 환관장이 호의를 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단1:9). 이방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포로 된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스1:1). 잠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잠21:1)

이 원리가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시편은 이미 예수님이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시41:9). 스가랴는 그 배신의 대가가 은 삼십 냥이 될 것과, 그 돈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쓰일 것까지 미리 기록했습니다(슥11:12~13). 거짓 증인들이 일어날 것도(시35:11),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행4:27~28) 헤롯과 빌라도는 자신들이 정치적 계산에 따라 자유롭게 판결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 하나하나가, 이미 창세전에 짜인 구속사의 각본 안에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을 행할 마음도 없던 사람을 선동해서 죄를 짓게 하시고, 나중에 그 죄를 물으신다는 말인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사건(출4:21) 앞에서 이 질문은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이 질문은 오늘 한 번에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있는 선택이 어떻게 동시에 성립하는지는, 유한한 우리의 이성으로 완전히 풀어낼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두 진리,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과 인간의 진정한 책임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나란히 붙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의 소설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다. 오늘 겪는 고난과 기쁨, 만남과 이별의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저자는 창세전부터 결말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우리를 둘러싼 악의도, 심지어 우리를 배신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그분의 손 안에서 결국 선한 목적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 그러나 그 티끌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붙드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저자가 계신다는 것,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지고, 동시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