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3장 1~6절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로마의 어느 지하 감옥,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고 창문 하나 없는 방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름은 바울, 한때는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달려가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감옥 안의 노인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얼굴에 알 수 없는 기쁨을 띠고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편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에게해 건너,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 에베소에 사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대부분 노예이거나 평범한 서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 바울에게서 놀라운 편지를 받았습니다. "너희는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예로, 이방인으로,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살아온 이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써 보낸 바울 사도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하나님의 사도라는 사람이 왜 저렇게 붙잡혀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혹시 우리가 믿는 이 복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믿음이 아직 여리고 어렸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들 수 있는 의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걱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영광에 대해 써 내려가다가 갑자기 붓을 멈춥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이렇게 시작해 놓고는, 정작 하려던 이야기를 잠시 미뤄둔 채 자신이 갇힌 이유를 먼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흐름대로라면 2장 끝의 이야기가 3장 14절로 곧장 이어져야 하는데, 그 사이 열세 절이 마치 괄호처럼 끼어든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먼 곳에 있는 교인들이 자신의 투병 소식에 낙심할까 봐, 편지를 쓰다 말고 "여러분, 제가 이렇게 아픈 것은 결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라고 급히 덧붙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네로의 죄수도 아니고, 로마 제국의 죄수도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다." 이 한 문장의 무게를 가늠해 보십시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고 싶으셨지만, 로마 제국이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여기 갇혔다"고 말했다면, 이는 위로가 아니라 절망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밖에서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허락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이 여전히 바리새인 사울로 살았다면 감옥에 갈 일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간 것은 순전히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술자리를 함께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멀어지고, 부모님이 예수 믿는 자녀에게 못마땅한 말을 던지고, 배우자가 "적당히 좀 믿어라"며 쏘아붙이는 일들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을 따라가 보면 결국 한 사람, 예수님을 만난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대적의 감옥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님의 손 안에서 그분의 죄수 된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서신들 곳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썼고, 디모데에게는 "주를 위해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썼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권했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가난해지고 고통만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답게,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은 크든 작든 어떤 형태로든 세상과 부딪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지금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불편도, 손해도 겪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스스로 물어봐야 할 일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나는 너희 이방인을 위해 갇혔다." 그가 감옥에 간 진짜 이유는 유대인들의 성전과 율법을 함부로 대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도 유대인과 똑같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했던 사람입니다(그는 "내 형제 골육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동족의 미움을 살 것이 뻔한 이방인 구원을 끝까지 전한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 든 에베소의 노예들과 서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고, 저 위대한 사도조차 우리를 위해 감옥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이 정도 시련에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다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비밀"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뜻과는 다릅니다. 누군가의 은행 계좌 비밀번호는 끝까지 숨겨야 하는 비밀입니다. 이런 것을 영어로 시크릿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쓰는 헬라어 단어 "무스테리온"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스터리 영화나 추리 소설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숨겨 놓지만, 그것은 영원히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드러내어 독자에게 더 큰 감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 두겠느냐. 감추인 것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무스테리온은 바로 이런 종류의 비밀, 곧 나타내기 위해 잠시 감추어 둔 비밀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바울은 이 단어를 두 가지 다른 층위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비밀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한 아기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는 매일 수많은 아기가 태어나지만, 그 아기는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 사건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그때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비밀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친히 바울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비밀입니다. 6절에 나오는 내용, 곧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특별한 비밀은 사실 일반적 비밀, 곧 그리스도라는 사건의 열매입니다. 결국 둘은 하나의 이야기,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5절 말씀,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를 근거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봐라, 교회는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계획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을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니까 궁여지책으로 교회라는 것을 만드신 것이다. 언젠가 교회 시대가 끝나면 유대 민족이 다시 하나의 나라로 회복되고,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세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들 중 극단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사복음서조차 우리와는 상관없다. 그것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교회에 관한 진짜 메시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3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창세기 3장 15절, 인류 역사의 가장 이른 순간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만 복 받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가운데서도 장자인 이스마엘과 에서를 넘기시고, 오히려 모압 여인 룻과 이방 여인 라합을 이스라엘의 족보 속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구약 전체가 이미 이 감추어진 비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5절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는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선지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 … 그들은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그들은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이 비밀을 멀리서 바라보며 기뻐했을 뿐,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직접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오랜 그림자가 마침내 실체로 드러난 것입니다.
6절을 원어로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됩니다. "함께 후사", "함께 지체",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라는 세 표현 앞에 모두 헬라어로 "쉰"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접두어는 "공동의", "동등한", "하나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유산을 상속받는데, 한 사람은 정식 상속자이고 다른 사람은 곁방살이하며 눈치를 보는 처지라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함께"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정확히 똑같은 지분으로, 똑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은 일등 시민이고 이방인은 이등 시민이라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그날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모든 육체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시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 즉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길,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길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비밀은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계시로 받아 기록해 두었고,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사도가 깨달은 것을 동일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밖에서 또 다른 특별한 계시를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도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질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비밀이라면서, 왜 나는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지 않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은 지금 이 땅에 겨자씨처럼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씨 뿌리는 농부에 비유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으면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정말 여기서 뭔가 자라나기는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고 마침내 열매를 맺습니다. 겨자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심길 때는 모든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하지만, 자라면 새들이 깃들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목수 한 사람과 보잘것없어 보이는 열한 명의 제자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은 삼천 명, 오천 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심장부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확장의 원리가 힘이나 무기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칼"을 들고 개종을 강요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복된 곳들은 훗날 대부분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섰습니다. 반대로 복음은 전하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방식으로, 마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여인이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으면, 그 적은 양의 누룩이 결국 반죽 전체를 부풀립니다. 우리가 지금 맛보는 천국은 아주 조금, 겨자씨만큼 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누룩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에,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옛 팔레스타인은 전쟁이 잦았기에, 부자들이 자기 보물을 밭에 몰래 묻어 두는 일이 흔했습니다. 주인이 갑자기 죽으면 그 보물의 위치는 아무도 모른 채 땅속에 묻혀 있다가, 훗날 밭을 갈던 종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종은 무엇을 했겠습니까.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밭을 샀습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정말로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붙잡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심순덕 시인의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입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찬밥 한 덩이로 끼니를 때우고, 한겨울 냇물에 맨손을 담가 빨래를 하고, 식구들 다 먹이고 자신은 굶어도 괜찮은 줄로만 알았던 한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손톱이 다 닳아 없어져도, 남편이 화를 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끄떡없어 보였던 그 어머니는, 사실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소리 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시인은 깨닫습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겉으로는 가장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죄수의 모습으로 오셨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능력이 바울을 감옥에서도 기뻐 웃게 만들었고, 노예와 서민으로 이루어진 에베소 교회를 견고히 세웠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내어주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눈물짓는 삶, 그런 삶을 살아낼 때, 훗날 누군가는 우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이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어 가는 방식이며, 우리가 지금 발견한 이 비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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