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2장 14~18절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 성벽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는 오래전부터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오래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다른 쪽에는 나중에 흘러 들어온 이방인들이 살았습니다.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마주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원주민들은 이방인을 "성문 밖의 개"라 불렀고, 이방인들은 원주민의 오만함을 경멸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그 성벽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 새겨진 원한의 표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지진이나 전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 그 담을 향해 걸어가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받아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쓰러지자 담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두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원주민"과 "이방인"으로 나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가진 하나의 마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이 그리는 그림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해 왔습니다. 그 능력을 증명하는 첫 번째 증거는, 죽어 있던 자들이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증거가 바로 이 무너진 성벽 이야기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수천 년 묵은 높디높은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담을 무너뜨린 이가 누구인지 밝히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그는 우리에게 화평을 주셨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화평을 나눠 주는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화평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어느 상담사가 오래도록 갈등을 겪는 부부를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담사는 두 사람에게 여러 대화 기술과 타협안을 알려 주었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시 싸움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몇 달 뒤 그 부부는 각자 다른 계기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상담사는 다시 그들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부부는 더 이상 대화법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제는 싸울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아요.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요?" 화평은 기술이 아니라 인격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그 상담사는 그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평화 협상, 모든 국제 회담은 결국 임시방편에 그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정상회담을 여는 이유 자체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와 다른 존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모든 전쟁을 들여다보면, 승자든 패자든 실제로 남는 이익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심과 무너지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서로를 파괴해 왔습니다. 총성과 포탄이 없을 뿐, 우리의 일상 속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그 파괴력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원적인 적개심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화평 그 자체이신 분이 원수 되었던 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와,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담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씁니다. 율법 자체를 "원수"라 부르지 않고, "원수 된 것"이라 부릅니다. 율법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을 담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원리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잘 만들어진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얼굴에 묻은 것을 보여 줄 뿐, 그 얼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문제는 거울이 아니라 얼굴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너는 스스로 설 수 없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거울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며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우월감에 취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원수처럼 대했습니다. 거울이 담을 쌓는 벽돌로 둔갑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완전한 제물이 되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결과, 구원은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담을 쌓던 벽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담이 무너진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 모델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랜 제국의 모델입니다.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나라는 영국 본토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하나의 깃발 아래 두었지만, 그 안의 각 지역은 여전히 저마다의 언어와 정체성, 심지어 감정의 골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나라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는 형태였을 뿐, 진짜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민자들의 나라 모델입니다. 새로운 대륙에 세워진 어느 나라에서는, 영국인도 이탈리아인도 독일인도 한국인도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시민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옛 국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뿌리를 유지한 채 모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그리는 교회는 후자의 모델입니다. 교회는 담이 헐린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란히 앉아 있는 곳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진리를 잘 보여 주는 오래된 일화가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한 목회자 필립 헨리는 매우 가난한 신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귀족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여인의 부모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냐?" 신분과 출신을 중시하던 시대에 당연히 나올 법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요." 그 남자의 아들이 훗날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가 되었다는 것은 부차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대답 속에 담긴 관점의 전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디서 왔는가"보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문제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음에도 사람들은 자꾸 옛 습관으로 돌아가 다시 담을 쌓는다는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 안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가 구제에서 소외된다며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출신 배경에 따른 파벌이 교회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갈등은 훗날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까지 번져 나갑니다.
혈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라는 위대한 두 선교 동역자가 갈라선 이유를 살펴보면 뜻밖에 소박합니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이전 선교 여행에서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이를 다시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조카라는 이유로 그를 감쌌습니다. 오늘날에도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후계자로 가장 먼저 그의 아들이 거론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이 실제로 그만한 자격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우선권을 얻는다면 공동체에는 반드시 균열이 생깁니다.
과거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자유롭게 식사하다가도,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교회의 기둥과도 같던 인물조차 자신의 과거 습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로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신앙의 연륜을 은근히 뽐내는 문제도 빠지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화려한 은사를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몸에 눈만 있다면 듣는 기능은 어디서 담당하겠느냐고 반문하며, 오히려 연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고보서는 금가락지를 낀 자에게는 좋은 자리를, 남루한 옷을 입은 자에게는 구석 자리를 내주는 세태를 강하게 꾸짖습니다. 출신도, 혈연도, 과거의 신분도, 신앙의 연륜도, 재물의 많고 적음도, 그 어느 것도 새로운 창조물이 된 교회를 다시 나눌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담을 허무시고 새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 궁극적인 목적을 마지막 절에서 드러냅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잠시 옛 성전의 구조를 떠올려야 합니다. 성전 가장 깊은 곳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그곳은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 문 앞에는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 있었는데, 거기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그룹 천사들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화염검을 든 그룹들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성소는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 인간이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게 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던 그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위에서부터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길을 여셨다는 뜻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육체가 곧 그 휘장이었고, 그 몸이 찢어짐으로써 우리에게 담대히 지성소로 들어갈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던 그 자리에, 이제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기도를 너무 자주 오해합니다. 기도를 나보다 힘센 존재에게 필요를 알리고 조르는 행위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오랫동안 병든 친구를 위해 기도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둘러 오시지 않고, 오히려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결국 그 친구는 죽었습니다.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무시당한 기도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흘 만에 도착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죽고 나서 사흘까지는 영혼이 육체 곁을 맴돈다고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흘마저 지나, 사람들이 완전히 소망을 접은 순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셨습니다. 죽은 자가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난 사건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구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깊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도의 진짜 목적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기도를 즉시 들어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때로는 응답을 미루심으로 기다림과 인내를 가르치시며, 심지어 때로는 우리의 기도와 정반대의 길로 이끄시면서도 결국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당신의 목적, 곧 우리의 거룩함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가십니다.
한 신학자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사귐이다. 그 사귐 속에는 요청할 때도, 침묵할 때도, 찬양할 때도, 묵묵히 함께 일할 때도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모든 행위가 곧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께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도구이고, 우리에게는 그 목적에 동참하는 도구입니다.
한 외국인 목회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기자가 한국 교회의 열정적인 기도 문화에 대해 물었습니다.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교회, 밥을 굶어 가며 드리는 금식기도, 며칠씩 이어지는 작정기도,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기도로 부흥했고, 기도로 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기도합니다. 불교인은 백팔 개의 염주를 돌리며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고, 이슬람 신자는 정해진 시간마다 몸을 낮추어 절합니다. 무당은 작두 위에서 신을 부르고, 어느 어머니는 정한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천지신명께 손을 모읍니다. 월드컵 응원의 함성도, 광장의 촛불도, 넓게 보면 무언가를 향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라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본성적으로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이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 기독교의 기도에는 분명한 인격이 있습니다. 범신론은 해와 달과 별과 벌레와 바위까지 모두 신이라 말하지만, 이는 결국 그 무엇도 진짜 신은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신론은 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먼 존재로 여깁니다.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기도는 결국 기계적인 절차로 전락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듯, 정성과 강도를 더 쏟을수록 응답이 커진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옛적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리를 지르고 칼로 몸을 상하게 하면서 신을 불렀지만, 끝내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반면 사사기의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위험한 서원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다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비극을 자초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순종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둘째, 기독교의 기도는 주도권의 방향이 다릅니다. 다른 신앙에서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 애타게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는 그저 응답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결과는 우리의 정성이나 언변의 화려함으로 좌우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기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그것을 경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응답의 배후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답은 뜻밖에 단순합니다. 관계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부모 앞에서 하는 말은 서툴고 두서없습니다. 발음도 어눌하고 문장도 엉망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부모도 아이의 말을 "문법이 틀렸다"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서툰 재잘거림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기뻐합니다.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는 이미 다 압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언어는 변해 갑니다. 사물의 이름과 설명이 중심이 되는 정보의 언어로, 다시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한 설득의 언어로 바뀌어 갑니다. 부모를 향하던 순전한 애정과 신뢰는 점차 다른 것들, 이를테면 장난감이나 친구 관계로 옮겨 갑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버지"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격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도는 점점 무언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말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아이처럼 솔직하게 마음을 쏟아 내는 관계의 언어입니다. "아버지,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무서워요." 이런 단순한 고백이야말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살아 있는 대화입니다. 말이 막히고 더듬거려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막힘없이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말일수록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중에 마음이 자꾸 흩어지고 집중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정말 집중해서 말하게 되는 것은, 상대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뿐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열심히 말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첫걸음은 내가 지금 말을 건네는 그분이 살아 계시고, 나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복음을 아는 데서, 곧 내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처음의 성벽 이야기, 담이 무너진 자리에서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았을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마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한가운데, 예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광장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문 안쪽에서,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조심스러운 존댓말로 격식을 차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광장의 주인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전에는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었던 그 호칭을, 이제는 누구나 매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18절까지의 짧은 다섯 구절은 결국 이 하나의 그림으로 수렴됩니다. 화평이신 그리스도가 담을 허무셨고, 그 담의 잔해 위에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지으셨으며, 마침내 그 새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서툴고 더듬거리더라도 진심을 담아 그분을 부르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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