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2장 11~13절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평생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족보를 추적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조상은 어느 왕국의 백성도 아니었고, 어느 계약에도 이름을 올린 적이 없었으며, 어느 약속의 수혜자로 기록된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바깥'에 있었습니다. 성 밖에, 계약서 밖에, 희망의 목록 밖에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에서 12절까지,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는 그 때에 그러했다"고, 그리고 13절에 이르러 단 하나의 접속사로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짧은 세 구절 안에,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 역전의 드라마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됩니다. 그 도시에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던 데라라는 노인이 있었고, 그의 아들 중 하나가 아브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이 약속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너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 한 사람에게 임한 복이 결코 그 한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복음의 설계도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람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열두 지파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백 년을 보내며 이백만이 넘는 민족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굳이 '한 민족'을 택하셨을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동시에 부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한 가족, 한 혈통, 한 국경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따로 세우셨을까요?
답은 이스라엘이 목적지가 아니라 '전시장'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신제품을 세상에 내놓기 전, 매장 진열대에 먼저 하나의 모델을 세워 두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울타리를 세우시고 그 안에서 두 가지 진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택하심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자는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택하심의 표식으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표식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면 복을 누리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 아래 놓이는 삶을 통해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세상에 보여 주는 배우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 배역을 완전히 오해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시 모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들이 곧 '최종 목적지'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초대장을 들고 다니라고 맡겨졌는데, 어느새 그 초대장을 자기들만의 회원증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는 죄의 종이니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 그들은 진짜 이스라엘이 무엇인지, 할례가 진정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가르쳐 주러 오신 분을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회원증을 자랑하다가, 정작 그 회원증을 발급한 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19세기 영국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하원에서 탄핵안에 오르자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소, 나는 유대인이오. 이 존경하는 신사의 조상이 아일랜드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을 때, 내 조상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며 세상에 율법과 종교를 전하고 있었소." 실제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이 우상 앞에 절할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2) 그들은 분명 유리한 고지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메시야를 거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 유리한 고지에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조롱받던 자들이었다. 그런 너희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 기억하는가?"
에베소서 2장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므네모뉴오', 곧 단순히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여 새기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회에게 구체적인 과거를 하나씩 짚어 줍니다.
그 첫 번째가 할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향해 '무할례당'이라 불렀습니다. 마치 회원증이 없는 사람을 문 앞에서 손가락질하듯이, 그런데 바울의 의도는 할례받은 자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방인은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던, 더 가련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는 원래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창세기 15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짐승을 둘로 쪼개 마주 놓게 하시고, 해가 진 뒤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계약 관습에서, 쪼갠 짐승 사이를 함께 걷는 것은 "이 약속을 어기면 나도 이 짐승처럼 쪼개지겠다"는 자기 저주의 맹세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걷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계약 당사자 양쪽이 함께 서약해야 할 자리에, 한쪽이 상대방 몫까지 짊어지고 홀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장차 있을 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쪼개지실지라도, 곧 십자가에서 찢기실지라도 이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미리 서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홀로 쪼개지기로 하셨는데, 왜 아브라함의 몸에도 표식을 새기라 하셨을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쪼개진 그 자리에, 너도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네 몸에 새겨 두어라." 할례는 곧 "나는 저주받아 죽은 자입니다"라는 몸에 새긴 고백이었습니다. 훗날 세례가 "나는 저주의 물에 빠져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그 갈라진 바다 사이로 모세가 홀로 앞서 지나갔고, 백성은 그 모세 안에서 함께 물에 잠겨 죽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세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할례의 진짜 의미는 살을 베는 의식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다시 사는 믿음이었습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를 이렇게 풀어 줍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롬 2:28~29)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 6:15, 표준새번역)
유대인들은 이 깊은 의미를 오해한 채로나마 그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은 그 의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회원증의 진짜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회원증조차 발급받은 적 없는 사람들이 조롱을 당한 셈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런 자들이었음을 기억하라."
11절에서 12절로 넘어가면, 바울은 세 겹의 '바깥'을 나열합니다. 그리스도 밖, 이스라엘 나라 밖, 언약들에 대한 외인,
먼저 그리스도 안과 밖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한 소속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율법과 할례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였는데, 이방인은 그 이정표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에베소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도 채 200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전 우리의 조상들 역시 예수를 알지 못하고, 율법을 알지 못하고, 참된 예배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간 이방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특수한 조건을 가리킵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는 민족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되어야' 했던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수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나병이 낫자 노새 두 마리에 유대 땅의 흙을 실어 갔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겠다는 결심으로, 유대의 흙 위에 서서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왕하 5:17). 그리고 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한 바사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었다"(에 8:17)고 기록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세계에서 이방인은 문자 그대로 '지도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3~17) 이방인은 그 약속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짓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이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캄캄한 상황에서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가, 사람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딸은 타국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정작 더 힘들어하는 쪽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목회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딸과 통화만 하면 오히려 힘이 나요. 진퇴양난인 상황인데도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하나님이 계신데 왜 걱정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는 분이니까, 이 어려움도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정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를 건네는 이 장면은,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청년이라고 어찌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폭풍 한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감옥에서 비슷한 고백을 남깁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소망 없는 사람은 작은 풍랑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소망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13절, 단 하나의 짧은 접속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는(누니 데)."
멀리 있던 자, 지도 밖에 있던 자, 회원증도 없던 자, 초대장의 존재조차 몰랐던 자,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깁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이로 나아왔느니라." 이 구절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신분 상승이 아닙니다. 성전의 지성소,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지극히 거룩한 공간을 가로막던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지도 밖에 있던 사람, 회원증조차 없던 사람이 이제는 그 찢어진 휘장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온 한 남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계약서에도, 어느 왕국의 명부에도, 어느 약속의 목록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국의 왕이 몸소 찾아와 자신의 피로 그를 그 명부에 새겨 넣었다면 어떨까요?
에베소서 2장 11-13절은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육체로 이방인이었고, 회원증조차 없던 자였으며, 그리스도 밖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언약들의 바깥에 있던 자였고, 소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옛날 지도 밖에 있던 우리를 이토록 가까이 이끄신 하나님이라면, 오늘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문제도 넉넉히 맡겨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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