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31) -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사랑이라는 이름의 의무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4.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0)

아침 출근길, 낯선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문이 닫히면 사람들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층수 표시판으로 향합니다. 그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엘리베이터가 더 빨리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왜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할까요?

별것 아닌 이 장면 속에 인간 존재의 깊은 상처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합니다. 낯선 이가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 방어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의견이 조금만 어긋나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지켜줄 사랑과 인정인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그 안전에 위협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인간관계 속에 심어 놓은 적대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히브리어에는 "
바라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복은 돈, 명예, 건강, 성공과는 결이 다릅니다. 바라크는 인간이 행복하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생명력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는 그 작은 복들은 이 거대한 생명력에서 흘러나온 몇 방울의 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력에는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 원천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에만 진짜 복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떠난 채 주어지는 부와 명예는 오히려 사람을 파괴하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몇 년 후 파산하거나 가정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합니다. 돈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 주어진 그 돈을 감당할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야 할 생명의 공급이 차단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한된 복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것은 마치 배터리처럼 언젠가 다 소진될 유한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소멸을 향해 가는 상태를 "
죽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가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합니다. "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합니까? 성을 쌓습니다(창 4:17).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입니다.

이 장면이 인류 역사의 축소판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순간, 인간에게는 두려움이 들어왔고, 그 두려움은 곧 자기방어로 이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성을 쌓습니다. 통장 잔고가 늘어야 안심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성을 쌓습니다. 누군가 나를 떠날까 봐 끊임없이 확인하고 집착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 속으로 도망칩니다. 성취와 인정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상숭배, 중독, 통제성향, 혹은 그냥 "
"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려는 몸부림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자기 자신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고 경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복음이 등장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차단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리는 사건입니다. 끊어졌던 생명의 공급관이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이제 더 이상 내가 스스로 나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성을 쌓지 않아도 됩니다. 방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서로 미워할 이유가 사라지고, 오히려 함께 있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재산을 통용하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쓴 것은 율법이 강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율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규칙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백성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 원리대로 완전하게 사셨던 유일한 분,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배신당하고 고통당하실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평안, 그것이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궁극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설레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감정, 그것도 사랑의 한 부분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
의롭다"는 표현은 법적인 정당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심지어 관계를 저버린 순간에도, 그 사람을 다시 언약의 자리로 데려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짐승 사이로 홀로 지나가십니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서 이것은 "
내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져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내가 쪼개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관계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성취된 장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일서는 십자가를 "
사랑"이라 부르고, 로마서는 같은 사건을 "의로우심의 나타남"이라 부릅니다(롬 3:23~26). 같은 사건에 붙은 두 개의 이름입니다. 사랑은 곧 의로움이고, 의로움은 곧 의무의 성실한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분노나 우울, 불안 같은 감정이 올라오면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
어쩔 수 없어. 감정이 원래 그런 거야." 그리고 그 감정에 자신을 통째로 내던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극심한 우울과 불안 속에 있습니다.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낙심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그냥 좋게 생각해, 다 잘될 거야" 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영혼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격의 주체로서, 우리가 감정에 대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14장의 열두 정탐꾼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부추겼습니다. "
그 땅 사람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백성들은 밤새 통곡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민 14:11)

전쟁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당연해 보이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
멸시"라 부르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두려움을 선택한 것이 멸시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신분이 주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 안전을 지킬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움과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옛 습관과 육신의 속임수에 다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미움 대신 사랑을, 우울 대신 기쁨을, 불안 대신 평안을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기 사랑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여순 사건 당시 그분의 두 아들이 좌익 청년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청년을 재판정에서 살려달라고 탄원했고, 나아가 그를 양아들로 삼아 공부를 시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님의 마음속에 우리가 아는 그런 감정인 보고 싶고, 애틋하고, 함께 있고 싶은 그런 감정이 그 청년을 향해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자기 아들을 둘이나 죽인 사람을 향해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솟아날 리 없습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알고 계셨습니다. 한 죄인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자리였습니다. 감정이 솟아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선교지에 나가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
저는 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슴을 치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오해한 것입니다. 감정적인 애정이 솟구치지 않아도, 하나님이 "거기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의로운 사랑이고, 진짜 사랑입니다. 결코 위선이 아닙니다.

이 원리는 부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혼할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 싶어서 결혼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나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어버리면, 상대가 나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반드시 다툼과 미움이 찾아옵니다.

자유로운 사랑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배우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심지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향해 감당해야 할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의로운 사랑입니다. 나의 안전을 배우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그 자유함 속에서 배우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찬양이 은혜롭게 느껴질 때도, 소음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

이것은 다윗이 언제나 감격에 차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감정이 따라오지 않을 때조차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겪었던 "
영혼의 밤", 길고 메마른 영적 침체의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시간을 허락하실까요? 감격과 체험이 없이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더 깊고 자유로운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모든 이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은 하나님이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한 피를 나눈 형제였습니다. 죄가 그 관계를 미움과 경쟁과 시기로 왜곡시켰을 뿐입니다.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웃, 어려운 형편의 이주노동자들, 우리 곁의 소외된 이들, 그들을 향해 인터넷 게시판에서 목소리만 높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나누는 것,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쏟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엡 2:10) 여기서 "작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이에마"입니다. 시라는 단어의 어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성껏 지으신 걸작입니다. 그런데 그 작품이 지어진 목적은 가만히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선한 일은 율법주의가 말하는 점수 따기가 아닙니다. 이미 회복된 관계 안에서,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도, 상대의 반응이 기대와 달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우리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아직 원수 되었을 때 그 의무를 다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우리는 더 이상 성을 쌓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숫자판만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안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자유함으로 오늘 하루, 우리 앞에 놓인 작은 의무 하나를 성실히 감당하는 선택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