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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33) - 담을 허무신 이, 유대인과 율법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4.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 :11~22)

시카고 무디 기념교회를 담임했던 해리 아이언사이드 목사가 캘리포니아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집시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
목사님, 25센트만 내시면 제가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봐 드리겠습니다." 아이언사이드 목사는 웃으며 25센트를 여인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지만, 나는 이미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알고 있소. 한번 들어보시겠소?"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신약성경을 꺼내 에베소서 2장을 펼쳤습니다. 1절부터 3절을 읽으며 말했습니다. "
이것이 나의 과거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나의 모습이오." 이어 4절부터 6절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현재요. 하나님이 그 큰 사랑으로 나를 살리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신 나의 지금이오." 그리고 7절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미래요. 장차 오는 세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그것이 내 앞에 놓여 있소."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뜨려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여인을 붙잡았습니다. "
잠깐, 앉아보시오.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알려드리리다." 그러고는 11절부터 22절까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점쟁이의 25센트짜리 운세를 궁금해하면서, 정작 손에 들려 있는 성경 속 참된 운명은 펼쳐보지 않고 사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본문,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22절까지는 바로 그 참된 운명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중심에는 ""이 하나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본 적 없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성전의 구조는 매우 익숙한 그림이었습니다. 성전 중심부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고, 그 바깥에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 그 옆에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성전과 같은 높이에 자리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열아홉 계단을 내려가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담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담 너머가 바로 "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교양 있는 이방인이라도, 심지어 로마 총독이라 할지라도 그 담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1871년,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너비 1미터 남짓한 돌판 하나를 발굴했습니다. 지금은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돌판에는 이런 경고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싼 이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렇게 하다가 붙잡힌 자는 누구든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책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 죽음을 걸어야 할 만큼 견고했던 벽, 그것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기 불과 3년 전, 바로 이 담 문제로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에베소 출신 이방인 친구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모습을 유대인들이 보고, "
이 사람이 더러운 이방인을 성전 안까지 데리고 들어왔다!"며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로마 군대가 겨우 소동을 진압하고 바울을 붙잡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읽는 이 편지는, 바로 그 벽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벽이 이미 무너졌다고 선포하는 편지인 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이방인들이 이 담 너머에 갇혀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
무할례당"이라 불렸습니다. 율법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습니다. 본문 12절은 이를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표현하는데, 원어로는 "아떼오스", 곧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조차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어떤 처지였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그 절망적인 자리에서 이방인들이 건짐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자기들의 특권으로 여겼던 그 구원의 자리에, 아무 자격 없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19절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권속"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케이오스", 문자 그대로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죽여서라도 갈라놓으려 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민족이고, 심지어 같은 교회 이름 아래 모인 우리가 왜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파벌을 만듭니까? 죽음까지 불사하며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도 십자가 앞에서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는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담을 쌓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은 같은 목적을 향해 함께 뛸 때는 잘 다투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함께 보며 울고 웃는 관객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본 적 있으십니까. "
저 배우가 왜 내 아내보다 예쁘냐"며 옆 사람과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툼은 목적이 갈리거나, 상대를 "우리 편"으로 여기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무덤 속에 누운 사람들은 서로의 무덤 크기를 두고 다투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 펄떡이는 옛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이미 헐어버린 벽을, 우리가 다시 벽돌을 쌓아 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이방인들을 멸시할 수 있었을까요? 그 뿌리에는 "
율법"에 대한 깊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 오해를 풀지 않고서는 오늘 본문도, 나아가 성경 전체의 흐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는 율법을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나열된 금지 조항 목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새 가전제품을 하나 사면 반드시 설명서가 딸려 옵니다. 그 설명서에는 "
이 온도 이상 가열하지 마시오", "물에 담그지 마시오" 같은 경고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제조사가 사용자를 괴롭히려고 적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계가 가진 모든 훌륭한 기능을 고장 없이, 가장 오래, 가장 안전하게 누리게 하려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설명서대로 쓰면 기계는 제 성능을 다 발휘하며 오래갑니다. 마음대로 쓰면 금방 고장 납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
이렇게 살면 네가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쁘게, 네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살 수 있다"고 알려주신 삶의 매뉴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 매뉴얼대로 살면 인간은 신적 성품에 참여하여 하늘의 삶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설명서를 내던졌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설명서 없이도 네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거짓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 앞에 그 "선악과"를 두십니다.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 이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그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받지 못한 사람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이 법을 알려주셨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 곧 양심에 그 법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롬2:14~15) 이것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대략 주전 1,500년경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주전 1,700년경,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이 세운 2.2미터 높이의 원통형 돌기둥에는 282개 조항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로 삼으라", "폭력을 휘두른 자는 곡물로 배상하라." 모세의 율법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과는 아무 지리적 연관도 없는 우리 고조선의 팔조법금에도 똑같은 정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모세의 율법이나, 함무라비 법전이나, 팔조법금이나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양심에 심어두신 그 법이 각 사회의 언어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심판대 앞에서 "나는 몰랐습니다"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처음 인간은 그 설명서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설명서가 오히려 저주의 통보서가 되어버렸습니다.

신명기 28장은 이 양면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신28:3,6). 그러나 불순종하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6,19). 축복과 저주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막10:29~30) 이 구절은 종종 헌금을 독려하는 본문으로 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백배로 돌려받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자식을 바치면 자식이 백 명이 됩니까? 아내를 바치면 아내가 백 명이 됩니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29절에 나열된 목록 중 30절에서 유독 하나가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아비"입니다.

왜 아비만 빠졌을까요? 아비는 곧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참 자녀로서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백 배로 돌려받는 부동산 투자 이야기가 아니라,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된 삶의 조건을 인간 스스로는 결코 채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는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지킬 수 없었던 그 설명서를 대신 완벽하게 지켜내시고, 그 지켜낸 의로움을 통째로 우리 것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을 과대평가하여 "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를 대표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거울삼아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비춰보라는 뜻이었는데, 그들은 그 거울로 오히려 몸을 씻으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신랄한 언어를 쏟아부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29,33) 창세기를 줄줄 외우던 유대인들에게 ""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끔찍한 저주의 상징이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던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악하게 살았던 세리와 창녀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자기 죄를 정직하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저는 세리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추악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죄가 없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는 적어도 위선의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눈을 뜨게 하신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되고, "
나는 결코 이 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구나" 깨닫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구원자로 등장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완전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여기 "가입했다"는 헬라어로 "나란히 함께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율법도 그 죄와 나란히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율법은 죄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어린아이는 유치원에서 친구의 장난감을 가져오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
그건 안 되는 거야"라고 알려주기 전까지는요.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남의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죄인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찌꺼기가 가라앉아 겉으로는 맑아 보이는 물컵을 상상해보십시오. 젓가락으로 한 번만 휘저으면 그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금세 드러납니다. 율법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율법이 그 착각을 깨뜨립니다.

둘째, 율법은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지렛대가 되기도 합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
학교에 폭죽을 가져오지 마라." 그 반 학생이었던 훗날의 신학자 제임스 보이스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 폭죽이 무엇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폭죽이 궁금해졌습니다. 결국 폭죽을 가진 친구를 수소문해 찾아가 얻어다가, 학교에 몰래 가져와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7장 8절이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금지의 팻말이 오히려 욕망의 방아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
절대 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문 앞에 서면 유독 그 안이 궁금해지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율법을 지렛대 삼아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탐심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날마다 죄를 짓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로마서 7장은 결혼의 비유를 듭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아내는 법으로 그 남편에게 매인 자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그 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법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힘을 씁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법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옛 남편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뵈옵고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부르짖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나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에스겔도 그러했습니다.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 순간, 펄펄 살아 날뛰던 우리의 옛 자아는 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서로 죽여서라도 갈라놓으려 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족이 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를 향해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
너희는 이제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십자가는 이미 그 담을 허물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넘을 수 있었던 그 견고한 벽이,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던 그 순간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담을 쌓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무너진 벽 앞에서 홀로 벽돌을 나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무덤 속 시체들이 서로 싸우지 않듯,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산 우리도 더 이상 서로 담을 쌓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의 권속 된 우리가 서로를 향한 모든 담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