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중국집 메뉴판 앞에 서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짬뽕이냐 자장면이냐, 그 사소한 갈림길 앞에서도 우리는 잠시 머뭇거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걸음을 세밀하게 인도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정작 하나님은 오늘 점심 메뉴 하나 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이 말씀들만 붙들면 우리는 하나님이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데려다주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작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취업 준비생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삼성전자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배우자를 위해 백일기도를 드려도 "이렇게 생긴 사람을 찾아가라"는 응답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억울해합니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도무지 논리적으로 화해되지 않는 문장들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너희의 구원은 창세전에 예정되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는 구절 옆에,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구절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14), 내 말에 거하라(요 8:31~32),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17), 생명과 사망 중에 생명을 택하라(신 30:15~20), 이 모든 명령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합니다. 이 두 진리 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슬그머니 버리는 것입니다. "다 예정되어 있으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라고 생각하며 나태해지거나, 반대로 "내가 열심히 선택하고 노력해야 구원받는다"며 불안한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둘 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절반만 붙잡은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아이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갈 것을 이미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이 돌을 밟을래, 저 돌을 밟을래?" 아이는 정말로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가짜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미 목적지까지 아이의 손을 놓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사실도 가짜가 아닙니다.
두 진리가 부딪힐 때, 그것을 억지로 하나의 논리로 봉합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죄책과 두려움에 짓눌릴 때는 "창세전에 너를 택하여 예정하였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하고, 우리가 나태와 방종에 빠질 때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역동성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곧 성숙과 거룩을 향한 여정 전체를 예정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 여정 위의 수많은 갈림길에서는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하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주 구체적으로 개입하신 순간들도 있습니다.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시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 하시고,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오라"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건들이 왜 성경에 특별히 기록되어 이야깃거리가 되었을까요? 그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 극히 드문 일, 구속사의 큰 획을 긋는 결정적 순간에만 일어나는 예외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청년이 "하나님, 어느 회사에 취직할까요?" 물어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배우자를 위해 그렇게 기도해도 "이런 사람을 찾아가라"는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내일 점심에 짬뽕을 먹을지 자장면을 먹을지, 그것조차 하나님은 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에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신앙의 연륜과 가치관과 인격을 총동원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실수 없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자유로운 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잘못된 선택을 할지 뻔히 아시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선택권을 맡기십니다.
어린아이가 벽난로 앞에 서 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뜨거우니까 만지지 마"라고 말해도 아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손을 대고, 뜨거움에 놀라 웁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아이는 다시는 그 난로를 함부로 만지지 않습니다. 말로 백 번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의 뜨거운 경험이 아이를 진짜로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뿌리 깊은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통제성향인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이기심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고, 상황을 내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방어입니다. 나를 지켜 줄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느끼기에 스스로를 지키려 미움과 시기와 다툼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이 습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선택을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놔두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잘못된 선택과 그로 인한 아픔을 통해서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이 길이 사실은 하나님과 이웃을 아프게 하는 죽음의 길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모하는 성품이 자라갑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 것은 분명 아브라함의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그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의 실수 하나로 인생 전체가 무너지게 두실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후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을 여전히 그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그 반복된 실수를 통해 아브라함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애굽의 왕 바로조차 벌벌 떨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이신지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옳은 선택과 그른 선택을 거듭하며, 아브라함은 마침내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을 제단에 올려놓을 만큼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더 극적입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리브가가 쌍둥이를 배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 착한 일을 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될 장자권을 자기 꾀로 빼앗겠다며 아버지와 형을 속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껍질을 벗겨 무늬를 내고, 양 떼가 물을 먹는 구유 앞에 세워 얼룩무늬 새끼를 낳게 하는 잔꾀를 부립니다(창 30:37~39). 그러나 실은 라반의 말대로, 하나님은 이미 야곱을 축복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 잔꾀를 부리지 않아도 야곱은 거부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꾀로 스스로를 고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사이에서의 선택도 그렇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야곱은 얼굴이 예쁜 라헬을 택했고, 그 대가로 7년을 더 일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130년의 세월을 살고 나서 그는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험악하였나이다"(창 47:9). 부와 자녀는 얻었지만, 그의 삶은 스스로 인정할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잘못된 선택을 그냥 놔두셨을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이 이 땅에서 몇 명의 자녀와 얼마의 재산을 갖고 사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기꾼 야곱을,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 빚어내는 데 있었습니다. 야곱이 참된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자녀 양육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고통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해 줍니다. 먹는 밥부터 배우는 악기, 대학 전공, 취업할 직장, 심지어 배우자까지 부모가 정해 줍니다. 겉으로 보면 참 바람직한 부모 자식 관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자녀를 로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서너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인다면, 그것은 잘 키운 것이 아니라 한참 잘못 키운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정신 연령이 열 살, 열두 살에서 멈춘 채로 몸만 자랍니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갖게 되면서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살아가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문제가 터집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체면과 위선의 가면을 벗게 되기 때문에, 내면에 숨어 있던 열 살짜리 미성숙한 인격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 문제를 네가 해결해 줘"라고 기대하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면 다투게 됩니다.
혹시 당신 주변에 유독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어린" 사람은 선택하며 살아가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도록 훈련받은 사람은 자기 행동에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압니다. 밥을 안 먹겠다고 떼쓰는 아이가 있다면, 억지로 좇아다니며 떠먹이지 말고 차라리 굶기십시오. "심통 부려봐야 배만 고프구나"를 스스로 배우게 하십시오. 그것이 자식을 사회의 흉기가 아니라 책임질 줄 아는 어른으로 키우는 길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습니까? 의지란 선택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나는 이것보다 저것을 더 좋아한다"는 선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완벽하게 중립적인 상태에서는 아무 선택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지는 결국 무언가에 예속된 것입니다. 무엇에 예속되어 있을까요? 우리의 이성과 양심과 정서,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의지가 마음에 예속되어 있는데, 그 마음이 부패했다면 그 의지가 어떻게 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의 의지는 선과 악, 양방향으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무죄한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거룩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한쪽 방향으로 완전히 편향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악을 향해서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물리 법칙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언제나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집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책 한 권을 공중 1미터 지점에 떠 있게 하려면 누군가 반드시 그것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힘들이지 않고 죄를 향해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그래서 죄인은 늘 염려하고 늘 두려워합니다. 자신을 지켜 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스스로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죄책감을 결코 갖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로 강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여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죄를 인식하고 반성하는 것은 옳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죄하는 죄책감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죄입니다. 죄를 정죄하고 벌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책감의 재판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저절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 만유인력을 거스르고 그들을 공중에 붙들어 놓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실존입니다. 가만 놔두면 불가항력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져 올리신 것,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에스라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가 편해서 남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켜 주신 소수만이 일어나, 고생길인 줄 알면서도 성전 재건을 위해 떠났습니다(스 1:1~5). 이제 선을 행할 능력을 받은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갈 5:16~17). 우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군대 시절, 바로 위 고참은 그 사람보다 세 살이나 어렸습니다. 어리다는 이유인지 참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제대하면 실컷 무시해 줘야지." 그런데 그가 제대 후 동생과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그 사람을 마주쳤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며 "충성!" 하고 경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습관이었습니다. 그 고참도 겸연쩍었는지 반말도 못 하고 우리는 서먹하게 헤어졌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링컨의 선언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 중에는 옛 주인을 만나면 여전히 쩔쩔매고, 심지어 다시 그 집에 노예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조르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륵스', 곧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힘입니다. 습관과 집착과 중독의 힘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죽은 옛 습관이 마치 여전히 살아 있는 진짜 나인 양 우리를 속입니다. "난 안 돼, 난 이상하게 죄가 좋아"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게리 토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거짓된 욕구입니다. 당신의 거듭난 영혼은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열망합니다. 그 사실을 말씀을 통해 자꾸 확인하고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속임수에서 한 걸음씩 빠져나오게 됩니다.
바른 선택에는 반드시 생명력과 기쁨이 따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전에 뜻밖에 800만 원이 수중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타던 차가 크게 낡지는 않았지만, "이 돈을 보태서 차를 바꿀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한 성도의 어머님이 위암 수술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갈등 끝에 그 목사님은 그 돈을 수술비에 보태기로 했습니다. 수술비는 넘치도록 모아졌고, 목사님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돈을 내려놓아 보는 연습을 통해, 목사님은 그 돈이 결코 자신을 진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른 선택이 왜 성도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지를 다시 배웠습니다. 그 경험은 또다시 바른 선택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목사님을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쌓인 선택의 경험들은 우리 안에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세계관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가장 근본적인 사고의 틀입니다. 그것은 모태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은 강하고 공격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방어적이고 거친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사람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 세계관만큼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기 세계관만 고집하는 사람을 우리는 고집불통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한번 형성된 세계관은 견고한 성벽처럼 무너뜨리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바로 성령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신기하게도 잃어버린 지갑도 기도하면 찾아지고, 택시가 필요하면 마침 택시가 나타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기도 응답이 잘 안 되고 삶의 어려움들이 밀려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수십 년간 잘못 쌓아 온 세계관을 조금씩 무너뜨리시는 과정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예수를 알아가며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사람, 그가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골로새서는 성도의 바른 세계관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골 3:1-10 요약).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실천의 반복을 통해서만 이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물고기가 가장 자유로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물속에서 힘차게 헤엄칠 때입니다. 만약 물고기가 물이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로운 물고기라 부르지 않고 굴비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농구 선수가 "왜 손으로만 공을 만져야 하나, 발로도 차자"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반칙입니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순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의도하신 그 이상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 때입니다. 그 삶의 원리를 기록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죄인이었을 때 율법은 결코 지킬 수 없는 정죄의 칼날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삶인지를 경험으로 배워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러나 사람들은 반발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예수님은 다시 답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는 우리를 열심히 부려 먹고, 그 월급으로 사망을 안겨 줍니다. 로마 시대 용병에게 주던 월급을 뜻하는 '옵소니온'이라는 단어가 바로 로마서의 "죄의 삯"입니다. 죄를 자유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를 따르기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오늘 점심 메뉴 하나 정해 주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로봇이 아닌 사랑하는 자녀로,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고 성숙해 가는 인격으로 빚어 가시려는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무수한 선택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선택 중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실수투성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오늘의 선택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빚어 가고 계십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도 선택하며 그 작품을 함께 완성해 가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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