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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32) - 어둠의 통치자와 빛의 백성, 우리는 왜 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어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
자유로운 일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마을에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지금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 바로 그 마을 사람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통치자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통치자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
정상"으로 여겨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첫 번째 문제입니다.

한 소방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화재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항상 방화복을 완전히 갖춰 입었습니다. 동료들이 "
요즘 큰불도 별로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불이 안 날 것 같은 날, 방심한 순간에 사람이 다칩니다." 그의 철저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 마귀, 귀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막연하고 낡은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매우 구체적이고 현재진행형인 실재로 다룹니다. 이 우주에는 하나님, 인간, 마귀라는 세 인격적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이 마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살아갑니다. 마치 적의 전력을 전혀 파악하지 않은 채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말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결코 무질서한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자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로마의 한 군단, 곧 수천 명의 병력을 가리키는 "군대(레기온)"라는 이름이, 여럿이면서도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은 그 조직성을 보여줍니다. 그 많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갔을 때도, 돼지들은 제각각 흩어지지 않고 일제히 벼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오와 열을 맞춘 군대처럼 말입니다.

한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왕에게는 특별히 아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아름다웠으며, 왕의 보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의 마음에 조용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이만큼 뛰어난데, 왜 나는 항상 두 번째여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곧 야망이 되었고, 야망은 반역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를 넘보았고, 결국 궁정에서 쫓겨나 유배되었습니다.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은 마귀의 기원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은유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하늘의 천사장이었던 존재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에 사로잡혀 반역했고, 동료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추방되었습니다(유 1:6). 그런데 이 쫓겨난 반역자는 자신의 왕국을 잃은 대신, 전혀 다른 왕국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 맡겨진 이 땅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
천지"의 ""은 히브리어 "솨마임", 복수형 "하늘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되, 유독 땅에 대해서만은 아담과 하와라는 대리 통치자를 세우셨습니다. 마치 회사의 오너가 특정 지사의 경영을 신뢰하는 지사장에게 전권 위임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지사장이 회사의 경쟁자에게 매수되어 회사의 기밀과 자산을 통째로 넘겨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위임받은 통치권을 손에 쥔 채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사탄에게 굴복했습니다. 그 결과 사탄은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명백한 배신과 찬탈을 통해 이 땅의 권세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의 어느 도시를 상상해 보십시오. 시민들은 겉으로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점령군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습니다. 통행금지, 검열, 밀고자들,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합군이 그 도시에 진입하여 점령군 사령부를 무너뜨립니다. 도시는 해방되고, 시민들은 더 이상 그 압제자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런 해방 작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그런데 해방된 도시에도 여전히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패퇴한 점령군의 잔당들이 도시 밖 어딘가에 숨어, 도시 안으로 다시 침투할 기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정면으로는 쳐들어올 수 없지만, 첩자를 보내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며 혼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사탄이 지금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산울로 두르고 계시기에 그는 직접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대신 거짓말과 속임수를 씁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신 편지들이 경고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탄은 교회를 겉으로 아주 도덕적이고, 부유하고, 사람들로 북적이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참된 부흥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정교한 심리전입니다.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경우는 오히려 드뭅니다. 유능한 첩자일수록 티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한 운동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코치는 시합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와 붙여 훈련시켰습니다. 선수는 코치에게 물었습니다. "
왜 저를 저렇게 강한 상대와 붙게 하십니까?" 코치가 답했습니다. "네가 저 상대를 이겨내야만, 진짜 실력이 자라기 때문이다. 편한 상대만 만나면 너는 절대 강해질 수 없어." 하나님이 사탄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활동하도록 허용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서 하나님은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조차 사용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사탄조차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서 사용되는 종에 불과합니다.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사탄은 우리를 파멸시키려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그 시험을 통과하며 오히려 더 깊은 사랑과 용서를 배웁니다. 마치 근육에 저항이 가해질 때 오히려 더 단단해지듯이 말입니다.

한 사람이 늪에 빠졌습니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는 것을 몰랐던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늪 밖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계속 소리쳤습니다. "
네가 자초한 일이야. 넌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거기서 그냥 가라앉아." 만약 그 사람이 그 목소리를 믿는다면, 그는 정말로 발버둥을 멈추고 가라앉을 것입니다.

사탄이 죄지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유혹하여 죄짓게 한 뒤, 거짓 죄책감으로 우리를 짓눌러 절망의 늪 속에 가라앉히려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도 죄책감에 눌려 "
나는 가짜 성도일 거야" 하며 자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늪 밖에서 손을 내미는 또 다른 음성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이제 사탄에게는 우리를 참소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감사함으로 그 늪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됩니다.

중세의 견고한 성을 떠올려 보십시오. 적군이 아무리 대군을 이끌고 와도, 성벽에 틈이 없다면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 안의 누군가가 몰래 성문을 열어주거나, 성벽의 작은 틈 하나를 방치해 둔다면, 그 작은 틈으로 적군 전체가 밀려들어 옵니다. 역사 속 수많은 함락된 성들이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외부의 강력한 힘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작은 틈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은 죄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죄라는 틈을 전혀 내주지 않는다면 사탄이 무슨 수로 우리를 건드리겠습니까?

중독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포르노, 도박, 술과 약물, 이런 것들이 왜 그토록 위험합니까? 잘 참다가도 단 한 번의 틈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 한 번의 틈이 사탄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라는 말씀은, 주문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 외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외쳤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했던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의미는, 우리가 이제 말씀으로 사탄의 속임수를 분별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의를 향한 소원을 끊임없이 주셔서 더 이상 쉽게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쓰던 거울은 지금과 같은 유리 거울이 아니라, 청동을 갈고 닦아 만든 동경이었습니다. 아무리 잘 닦아도 얼굴의 대략적인 윤곽만 보여줄 뿐, 작은 흠이나 얼룩은 비춰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거울을 보고 돌아서면 자기 얼굴이 정확히 어땠는지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3~24) 말씀을 대충 흘려듣기만 하면, 우리 삶은 그 흐릿한 거울처럼 아무런 변화를 남기지 못합니다.

반면 말씀은 정밀한 수술 도구와 같습니다. "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할 때, 이 "온유함"이라는 단어에는 짐승을 길들인다는 뜻과 함께, 처방된 약을 정량대로 먹어 실제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수술대에 오른 환자가 부끄럽다고 옷을 벗지 않으면, 의사는 수술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저속함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됩니다. 좋은 고전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는 있어도, 좌우에 날선 검처럼 인격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참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말씀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았고, 지금 구원받아 가고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조각해 가고 계십니다.

어떤 산에 산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성냥불 하나가 이 큰불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성냥불이 아무리 강해도, 그 주변에 바싹 마른 낙엽과 장작더미가 없었다면 그 불씨는 곧 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산불이 그토록 크게 번진 진짜 이유는 성냥불 자체가 아니라, 이미 그곳에 쌓여 있던 마른 장작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질투에 사로잡혀 동생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훗날 총리가 된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형들의 악함을 선으로 바꾸어 쓰셨다고 해서 형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형들 안에 이미 질투와 미움이라는 마른 장작이 쌓여 있었고, 사탄은 단지 그 위에 불씨 하나를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약 1:14~15)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원래부터 도둑질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자였습니다(요 6:70). 사탄은 그 안의 탐욕이라는 장작에 불을 붙였을 뿐입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신학자 아더 핑크는 이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사람이 죄를 짓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이미 죄악 된 행위들이 넘지 못할 미리 정해진 한계선과 같다는 것입니다. 불씨를 탓하기 전에, 우리 마음 밭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쟁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흔히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십자가로 사탄의 결정적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사탄에게 발판을 내주지 않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이 싸움은 우리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죄 된 욕망을 억제하시고 바른 길을 비추시는 그 도우심을 의지하며,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깨어 기도하며, 회개에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이미 해방된 도시의 시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벽 밖을 서성이는 옛 지배자에게, 단 한 뼘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