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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38) -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8.

에베소서 3장 7~12절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바울은 로마의 감옥 한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손목에는 쇠사슬 자국이 남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로마 병사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 그가 펜을 들고 쓴 첫 문장은 이랬습니다. "
이 복음을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이상한 일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자신이 받은 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억울함도, 원망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몇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 밖,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젊은 집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중이었습니다. 그 현장 한쪽에 한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겉옷을 맡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말하자면 이 살인의 후원자였습니다. "
너희가 던져라. 내가 책임진다." 그런 자세로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 후 사울은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목적은 하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품 안에는 대제사장의 공문이 있었고, 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훗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신약 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씁니다. 구약에서 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세, 신약에서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울입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단 한 사람만 꼽으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바울을 말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이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스데반의 피 옆에서 옷을 지키던 이 사람을, 하나님은 왜 하필 자신의 비밀을 전할 통로로 삼으셨을까요?

에베소서를 배운 사람이라면 이미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세전에, 즉 태어나기도 전에 택함을 받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옷을 지키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닌 그 시간은, 바울이 택함받기 위한 조건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택함받았기에 그저 통과하도록 허락된 시간이었을까?

답은 후자입니다. 야곱의 속임수 가득한 삶도, 바울의 살기등등한 삶도, 그들이 택함받았기 때문에 지나가도록 놔두신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구원의 본질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자격을 갖춘 사람을 골라내는 심사가 아니라, 아무 자격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건져내시는 사건입니다. 바울의 인생 전체가 이 진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미련하다 하는 것, 약하다 하는 것, 천하다 하는 것을 택하셔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다 무식하고 가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찾아가시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한 목회자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저도 젊은 시절엔 참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성질 급하고, 놀기 좋아하고, 야망은 크고, 승부욕은 넘쳐서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에 아주 능했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그 죄책감에 짓눌려 살기도 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그 부끄러운 과거가 오히려 은혜의 크기를 알게 하는 거름이 되더군요."

이삭처럼 모범생의 삶에서 건짐받는 사람이 있고, 야곱처럼 파렴치한 삶에서 건짐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격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본다면, 아마 야곱 쪽이 더 크게 감사하지 않을까요? 다만 이것이 "
그러니 엉망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요점은, 우리 모두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건짐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은혜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사람은 언제든 교만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를 믿으면 삶의 모든 부분이 풍성해집니다. 사업도 풍성해지고 건강도 풍성해집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그런 세속적 풍요라면, 바울은 실패한 증인입니다. 그는 평생 병약했고, 가난했고, 감옥을 들락거리다 결국 순교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부자가 훨씬 많고, 예수 믿지 않는데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풍성"은 금과 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합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사건을 "예수 믿으면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는 식으로 좁혀 읽으면 안 됩니다. 요점은 은과 금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떡과 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 직후에 나옵니다. 그 현장을 상상해보십시오. 갈릴리 언덕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끼니를 놓쳤습니다. 아이들은 배고파 칭얼거리고, 어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떤 것일까요? 아이를 굶겨본 부모라면 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 앞에 준비된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요한복음 원문은 이 물고기를 "
옵사리온"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큰 생선이 아니라, 멸치 조림처럼 작은 물고기를 조미해 놓은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뷔페 앞에 놓인 콩떡 한 접시 같은, 누구도 대단하다 여기지 않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라한 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리자, 오천 명, 다 합치면 삼만 명에 가까운 무리를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리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의 풍성도 그런 멸치 조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 안에 엄청난 풍성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핍 한가운데서, 채워지는 배부름과 해갈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 기간의 대부분을 감옥과 고문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속에서 그는 풍성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예수님이 먼저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뜻밖입니다. "내가 너희 짐을 대신 다 져줄게"가 아닙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정말 예수님의 멍에가 가벼웠을까요?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처형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의 병이 나았다." 결코 가벼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 길을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살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인터넷에 떠돌던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남매가,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시는 아빠를 보았습니다. 두 아이는 몇 달 동안 버스비를 아껴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지만, 아빠가 새 구두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으실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정확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그 목적을 위해 겪는 고통 속에서도 뜻밖의 기쁨을 함께 맛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전해야 할 풍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의 풍성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도 빛나는 하늘의 풍성입니다.

예수님은 "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 오히려 기뻐했고, 베드로는 매를 맞고 나오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가난하고 쪼들리고 자주 옥에 갇혔던 바울이 편지마다 "풍성", "부유(플루토스)"라는 단어를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왜 대접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아직 이 풍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구원받았을지 몰라도, 이 풍성이 삶 속에서 실제로 누려지고 흘러나갈 때, 그 믿음은 비로소 진짜가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로 옮겨갑니다. 바울은 9절부터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이유는, "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서 "정사와 권세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 속에서 하늘의 관중석에 앉아본 천사가 되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에 천사들은 창조를 지켜보았습니다. 별들이 자리를 잡고, 계절이 돌고, 온갖 생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천사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제 끝났구나. 하나님은 저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만드실 거야." 그것이 가장 깔끔한 해결책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살려두셨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온통 악해졌을 때도, 홍수 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 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천사들은 더욱 의아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악한 자들을 왜 살려두시는가?

그러더니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갈대아 우르의 한 남자를 찾아가십니다. 그를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시더니, 아내를 두 번이나 위험에 팔아넘긴 그 좌충우돌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붙들고 가십니다. 백 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주시고는, 그 귀한 아들을 다시 바치라 하십니다. 그리고 사기꾼 야곱을 택하시고, 그의 야비한 삶을 보고도 그를 구원하십니다. 요셉을 애굽의 감옥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사백 년 노예살이로 몰아넣으십니다.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팔십 년이나 기다리게 하십니다. 천사들은 아마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
이제 모세가 여든인데, 곧 죽을 텐데…"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나이에 그를 부르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계속 죄를 짓습니다. 신명기의 무서운 경고, "
네 자녀의 살을 먹을 것이라"는 그 경고가 실제로 열왕기하에서 일어납니다. 두 여인이 서로의 아들을 삶아 먹었다는 참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에게 이 모든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의 관중석이 술렁였습니다.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그 탄생을 축하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궁금했을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이 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하는가?

이사야는 환상 중에 여호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것이 사실 예수님의 영광을 본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시던 그분이 땅에서는 매를 맞으면서도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천사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시고, 성령이 임하시고, 그렇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절대로 하나님을 알 리 없어 보이던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천사들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
아,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를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으시면서 죄인을 건져내시는 지혜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시편 85편은 이미 이 그림을 예고했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이것을 하나님 지혜의 최종 극치로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여기 "살펴본다"는 단어는 몸을 잔뜩 구부려 가슴 졸이며 들여다본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천사들도 이 복음의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밀을 완전히 알게 된 우리는 얼마나 고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복음은 힘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썩어지는 밀알처럼,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전해집니다. 지금 이 순간도 천사들은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의 표현대로, 사도들은 "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은 말합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지금도 한 사람이 돌아올 때마다 하늘에서는 환호성이 터집니다. 바울이 말한 "각종 지혜"라는 표현은, 다소의 사울을 다메섹 길바닥에 고꾸라뜨린 그 지혜이며, 유럽 최초의 신앙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그 지혜이며,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부르신 그 지혜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를 부르신 바로 그 다양한 지혜입니다. 그러니 삶이 조금 힘들다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게 무슨 하나님의 지혜냐"고 섣불리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지금 이 삶은 천사들도 궁금해하며 지켜보는 그 지혜 안에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12절입니다. "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당당히 나아감"이라는 표현, 헬라어로 "프로사고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어려운 곳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제주도 출신 학생들 사이에는 "앵커"라는 이름의 사교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준수해야 하고, 집안 형편도 좋아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서울대 입학보다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문턱이 높은 곳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프로사고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감정도, 체험도 아닙니다. "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느낌으로 평가합니다. "오늘은 왜 눈물이 안 나지? 은혜가 떨어졌나?"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 전체가 감정으로만 정리될 때입니다. 기독교는 신비로운 종교입니다. 기적도 있고 신비한 체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비주의란 교리와 상관없이 자기의 오감으로만 신앙을 정의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체험이 사라지면 곧바로 불안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부흥회에서 눈이 빠지도록 울었다고 해서, 혹은 전기가 오르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계기는 될 수 있어도, 거기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무당을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배우고 공부해야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가 힘없이 흐지부지한 이유도, 예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말합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모두 이 사실을 가리키는 표지판, 즉 "세메이아"였습니다. 문둥병자, 소경, 귀머거리는 타락하고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이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인이었습니다. 초점은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그 사람의 믿음과는 상관없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기적을 "요나의 표적"이라 부르셨습니다. 사인판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듯, 기적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뿐입니다.

가장 극적인 증거는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실제로 죽었던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수를 믿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런데도 왜 오늘날 사람들은 부흥회 강사가 손으로 밀어서 쓰러뜨려 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능력이 없다"고 여깁니다. 말씀으로는 믿어지지 않으니,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얼치기 무당 짓에 가깝습니다.

시편 77편의 기자는 절망 속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
주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런데 그가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감정을 다잡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그가 아는 사실,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이 닥치면 신앙을 버립니다. 느낌과 감정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리 위에 서지 않은 신앙은 언제든 흔들립니다.

마지막으로, 12절의 첫 단어를 다시 보십시오. "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갑니다. 목사가 아니라, 신부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어느 목회자는 이런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구역 예배에 참석했는데, 자신이 조금 늦게 도착하자 교인들이 식사를 미루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역장이 대답했습니다. "교회의 어른이 안 오셨는데 어떻게 먼저 식사를 하겠습니까." 그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이 아닙니다." 가톨릭이 나누어 놓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어느새 개신교 안에도 스며들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과 더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맡은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밥을 짓는 것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님 백성의 거룩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 성직입니다. 목사를 우상화하는 것은 죄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향해갑니다. 감옥 안, 쇠사슬에 묶인 한 남자가 자신을 "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 부르면서도, 그 입술로는 "풍성"과 "당당함"을 노래합니다. 그의 신앙은 감정의 파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신 분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대 뒤에는, 창세 전부터 이 모든 각본을 지켜보며 궁금해하던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관중석에 앉아, 자신들이 앞으로 섬겨야 할 존재들,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과 바꾼 그 존귀한 존재들을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그 관중석을 향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건물을 두고 다투는 모습인가, 아니면 자격 없는 자를 찾아가신 그 은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그 풍성함인가? 신앙은 느낌이 아닙니다. 정확한 복음의 이해 위에서 시작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것,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뼈대가 됩니다. 천사도 궁금해하던 그 비밀을 이미 알게 된 사람으로서, 오늘도 그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권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