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이 병 들었으므로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그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리니"(열왕기상 14:1~6)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그는 급히 아내를 불러 말합니다. “변장하고 실로로 가라. 하나님의 사람 아히야가 너에게 아이가 어떻게 될지 말해 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세우고, 자기 손으로 제사장을 임명하며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대체할 만큼 당당했고, 스스로 만든 단에서 스스로 정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병들자, 그는 갑자기 자기가 만든 신을 버리고 진짜 여호와의 선지자에게로 도망갑니다. 왜일까요? 가짜 신은 평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말 생명이 걸린 순간에는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을 여로보암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짜 신은 편할 때만 필요하고, 진짜 하나님은 절박할 때 찾습니다. 여로보암은 평소에는 금송아지도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겉보기엔 비슷하니까’, ‘굳이 예루살렘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까.’ 종교도 편리성이 기준이 되고, 신앙도 자기 욕망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비틀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병들자, 금송아지를 찾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세운 단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임명한 제사장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장까지 시켜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입니다. 평소엔 내가 만든 신을 향해 열심을 내다가도, 정말 죽음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진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심연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인식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진짜 하나님께로 몰아넣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든 사건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로보암에게 마지막으로 주시는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금송아지를 부수고 다시 진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삶이 너무 순조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 내 유익, 나의 기분을 채우는 종교적 행위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그 자리에 오래 두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막히게 하시고, 때때로 침묵하시고,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가 만든 가짜 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자리이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섬겼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을 줄 아는 “남아 있는 신앙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까지 이르는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짜 하나님을 찾되, 자존심 때문에 변장시켜 몰래 찾아가게 했습니다. 겉으로는 금송아지를 섬기며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혹시 이게 아닌 건가?” “진짜 하나님은 따로 계신데…”하는 양심의 찔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서 있고, 십자가 아래에 있지만, 정작 마음은 금송아지를 향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 인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하나님, 내 성공을 돕는 하나님… 그러나 삶에 큰 충격이 오면 우리 안의 숨겨진 진짜 신앙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만이 필요합니다.”
진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자기 나라가 흔들릴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나라와 안전은 결국 모두 무너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행복하고 부자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심판받은 곳이며 예수님이 불을 던지러 오신 곳이며 마지막 날에는 모두 사라질 곳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곳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금송아지를 붙드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행복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실재가 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길로 부르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지 않았다면 여로보암은 결코 실로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너의 금송아지를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든 신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나에게만 길이 있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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