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말라기 1:1~5)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는 사람, 하나님 편에서 말을 전하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말라기를 통해 전해진 첫 마디가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격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지만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질문은 가벼운 투정이 아닙니다. 따지고 들고, 항의하고, 삿대질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겁니까?”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했지만 기대하던 영광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약속된 “만국의 보배”도 보이지 않고, 나라의 형편은 여전히 초라했고, 삶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기다려도 변화가 없고, 시간이 지나도 회복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식었습니다. 감사가 식어버렸고, 제사도 형식이 되었습니다. 눈먼 제물, 저는 짐승, 병든 짐승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만큼 그들의 예배는 무너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형편 개선’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항의하자 하나님은 ‘그때 그때 챙겨준 일’이나 ‘복을 준 흔적’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선택’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사랑의 근원을 설명하시려면 ‘형편’이 아니라 ‘언약’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의 태 속에서 두 아이가 싸울 때,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이 더 의롭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더 나았거나, 더 착하거나,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거는 야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언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의 삶은 왜 더 고달팠는가? 흥미로운 것은 “사랑받은 야곱의 삶이 사랑받지 못한 에서의 삶보다 훨씬 고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눈물의 역사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달아나는 도망자, 14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혹사 당한 종, 네 아내와 얽힌 끝없는 가정 갈등, 딸의 강간 사건, 장남의 패륜, 흉년으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타양살이, 바로 앞에서 고백하던 말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이런 야곱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삶”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안 받는 게 낫겠다.”
사랑은 편안한 길이 아니라, 약속의 길로 이끄시는 손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을 끝까지 보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중요한 고백을 남깁니다. “내 뼈를 애굽에 묻지 말고 약속의 땅에 묻어라.” 야곱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해석하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축복도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사랑의 본질이 ‘형편 개선’이 아니라 “언약을 붙잡도록 끊임없이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택받지 않은 에돔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서는 힘이 있었고, 부유했고, 400명의 장정까지 거느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강했고 더 안정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내가 헐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불릴 것이다.”
선택받지 않은 자의 특징은 늘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왕국을 쌓습니다. 하지만 그 왕국은 하나님이 헐어 버리시면 끝입니다.반대로 선택받은 자의 특징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니 결국 약속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도 같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나이까?” 우리도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스라엘처럼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이렇게 힘들게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붙들고 있지 않느냐. 내 사랑은 네 환경이 아니라 나의 언약 위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를 풍요로 이끌지만, 더 깊고 강한 사랑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 약속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길은 편안한 길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언약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애굽’을 흔드시고, 우리가 붙잡고 있던 안정감을 무너뜨리며, 우리를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이키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형편”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 사랑의 증거는 지금의 편안함이 아니라,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손길입니다.
야곱이 결국 약속의 땅을 붙들었듯 우리도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언약 때문에 시작되었고, 언약 때문에 끝까지 갈 사랑,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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