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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

역대상 - 가장 작은 곳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9.

"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의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낳은 아들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에게 훌을 낳아 주었고,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그 후에 헤스론이 육십 세에 길르앗의 아버지 마길의 딸에게 장가 들어 동침하였더니 그가 스굽을 헤스론에게 낳아 주었으며, 스굽은 야일을 낳았고 야일은 길르앗 땅에서 스물세 성읍을 가졌더니, 그술과 아람이 야일의 성읍들과 그낫과 그에 딸린 성읍들 모두 육십을 그들에게서 빼앗았으며 이들은 다 길르앗의 아버지 마길의 자손이었더라. 헤스론이 갈렙 에브라다에서 죽은 후에 그의 아내 아비야가 그로 말미암아 아스훌을 낳았으니 아스훌은 드고아의 아버지더라."(역대상 2:18~24)

성경을 읽다 보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페이지에서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힙니다. 낯선 이름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족보 때문입니다. “
헤스론은… 갈렙을 낳고… 에브라다는… 훌을 낳고…” 우리는 이런 부분을 읽다가 조용히 페이지를 넘겨버리곤 합니다. 너무 평범하고, 너무 지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이런 이름들 사이에 당신의 비밀을 숨겨 두셨습니다. 사실 족보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입니다. 밥 짓고, 아이를 낳고, 울고 웃으며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평범한 자리 속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평생을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손수레를 끌고 시장에 나갔고, 비 오는 날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특별한 신앙인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큰 간증도 없었고, 유명한 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늘 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
하나님, 오늘도 예수만 놓치지 않게 해 주세요.” 삶은 가난했고 몸은 늙어갔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없어도, 몸이 아파도, 자녀가 속을 썩여도 예배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두고 “
교회에 중독된 것 아니냐”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사람은 그렇게 힘든데도 예수를 떠나지 못할까요?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붙드심이라고 말합니다. 내 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도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세상이 다 흔들려도 말씀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자꾸 “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커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의 예상과 반대로 움직이십니다.

역대상 족보 속에 등장하는 “
에브라다”라는 이름은 훗날 “베들레헴 에브라다”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세상은 큰 도시를 원했습니다. 강한 왕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라면 예루살렘 궁전쯤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작은 마을, 가장 낮은 자리, 냄새나는 마구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학벌로, 돈으로, 능력으로, 신앙의 열심으로도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네 힘이 아니다.

성막을 만든 부살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재능 있는 기술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그의 손재주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왜 굳이 성령의 충만이 필요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 재능을 붙잡고 스스로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믿음이 좋아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왕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긍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은 내가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패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업도 무너지고, 인간관계도 깨졌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내 삶은 계속 낮아지기만 할까?” 그때 친구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은 네 인생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네가 붙들고 있던 ‘너 자신’에게서 빼내고 계신 건 아닐까?” 그 말에 청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너무 자주 오해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인도라고 생각하고, 형통하게 되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인도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끌어내어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무너뜨리고, 오직 예수의 은혜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가 은혜가 되고, 눈물이 구원이 되며, 낮아짐이 축복이 됩니다.

역대상의 족보는 그래서 따뜻합니다.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이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어쩌면 족보처럼 평범해 보일지 모릅니다. 반복되는 하루,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여전히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면,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일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