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은 이러 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딘하바이며, 벨라가 죽으매 보스라 세라의 아들 요밥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요밥이 죽으매 데만 종족의 땅의 사람 후삼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후삼이 죽으매 브닷의 아들 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하닷은 모압 들에서 미디안을 친 자요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하닷이 죽으매 마스레가의 사믈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고, 사믈라가 죽으매 강 가의 르호봇 사울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사울이 죽으매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바알하난이 죽으매 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바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라 메사합의 손녀요 마드렛의 딸이더라. 하닷이 죽으니라 그리고 에돔의 족장은 이러하니 딤나 족장과 알랴 족장과 여뎃 족장과, 오홀리바마 족장과 엘라 족장과 비논 족장과, 그나스 족장과 데만 족장과 밉살 족장과, 막디엘 족장과 이람 족장이라 에돔의 족장이 이러하였더라."(역대상 1:43~54)
인류의 역사에서 '왕'이 있다는 것은 곧 강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조직이 있다는 뜻이고, 조직이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이며, 힘이 있다는 것은 번영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는 나라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 왕정은 문명의 상징이었고, 발전의 척도였으며, 생존의 조건이었습니다.
역대상 1장 4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들이 이러하니라." 이 한 문장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스라엘보다 먼저, 에돔에 왕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에돔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의 후손들보다 훨씬 앞서 왕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에돔이 앞선 것입니다. 에돔이 더 강하고, 더 조직적이며, 더 성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선택은 오히려 실패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에서에게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는 사냥을 마치고 지쳐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배가 고팠고, 눈앞에 붉은 팥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장자권과 맞바꾸자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장자권이란 당장 먹을 수 없는 것이었고, 팥죽은 지금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서에게 그 순간, 장자권은 죽은 후에나 쓸모 있을 서류 한 장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장면을 단순한 실수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에서를 가리켜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라고 부릅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실재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유익을 영원한 가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은 그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을 세웠습니다. 왕이 죽으면 또 다른 유능한 왕을 뽑았습니다. 역대상의 기록을 보면, 에돔의 왕위는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벨라가 죽자 요밥이, 요밥이 죽자 후삼이, 후삼이 죽자 하닷이 왕이 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성읍, 다른 지역 출신의 왕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일종의 선출제였습니다. 능력 있는 자가 왕이 되는 합리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에돔은 철저하게 '실력주의'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강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과연 강한 것이 축복입니까? 한 가지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일찍부터 사업 수완이 뛰어나 서른 살에 자기 회사를 세웠습니다. 직원도 있고, 건물도 있고, 통장에 돈도 있었습니다. 동생은 달랐습니다. 늘 일이 꼬였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망했고, 취직을 하면 회사가 어려워졌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해야 했고,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 속에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형이 축복받았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형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고, 간증도 그럴듯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사업이 잘 됩니다." 동생은 교회 뒤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형처럼 간증할 것도 없었고, 헌금도 많이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매 주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형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형은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성공은 하나님 없이도 유지되었고, 그의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동생은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이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말합니다.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 말 속에 핵심이 있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그들이 원한 것은 에돔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강한 왕이 있고, 군대가 있고, 체계가 있고, 눈에 보이는 리더십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림이니라." 이스라엘의 왕을 달라는 요청은 사무엘 개인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 되심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정신입니다. 팥죽이 지금 당장 필요하고, 장자권은 나중 일이라는 그 마음, 눈에 보이는 왕이 지금 당장 필요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막연하다는 그 마음, 에돔이 먼저 왕을 세우고 강해진 것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던 그 마음, 그 마음이 결국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라는 요청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셨던 이스라엘의 왕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신명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갖춰야 할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말을 많이 두지 말라,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오직 이 율법서를 곁에 두고 평생 읽으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가장 약한 왕이었습니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화려한 후궁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왕이었습니다. 에돔의 왕도와 이스라엘의 왕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같은 오해를 품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를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정말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해결해 주는 왕, 경제를 살려줄 왕,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줄 왕. 그것이 그들이 원한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시자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들은 에서처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떡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왕국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의 굴욕을 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에돔의 왕들처럼 능력으로 선출되어 강력하게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방식으로 오신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상상하는 왕과 얼마나 달랐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합니까? 에돔이 보여주는 길은 분명합니다. 능력 있는 왕을 뽑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 세상에서 잘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보여주는 길은 다릅니다. 그것은 때로 에돔보다 늦고, 에돔보다 약해 보이는 길입니다. 왕을 세우는 데도 에돔보다 수백 년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시편 73편의 시인 아삽은 바로 이 갈등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내 발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며 그는 흔들렸습니다. 에돔이 왕을 세우고 강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장로들이 흔들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들의 결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성도의 형통은 세상의 기준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음이고, 하나님의 인도 안에 있음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며 그 긍휼을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에돔의 왕들은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역대상의 족보 속에서 죽음의 연속으로만 기록됩니다. "벨라가 죽고... 요밥이 죽고... 후삼이 죽고..." 왕들이 아무리 강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같았습니다.
반면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연약함으로 오셨지만, 그 연약함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왕 되심이 우리의 형통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에돔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강하고 합리적이며 능력 있는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한참 후에야 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왕의 계보를 따라 영원한 왕이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왕이 오셨습니다. 세상이 원하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했던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원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왕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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