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세라의 아들은 시므리와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라니 모두 다섯 사람이요. 갈미의 아들은 아갈이니 그는 진멸시킬 물건을 범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이며, 에단의 아들은 아사랴더라.(역대상 2:3~8)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족보 앞에서 늘 멈칫합니다.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름들의 행렬 때문입니다.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이상하다는 느낌이 더 컸습니다. 왜 이 이름들은 이렇게 뒤죽박죽일까? 왜 장남이 빠지고, 왜 막내가 앞서며, 왜 수치스러운 사건들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을까? 성경의 족보는 인간의 논리로는 좀처럼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 뒤죽박죽이야말로 하나님의 문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었습니다. 장자 르우벤이 있었고, 시므온과 레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의 족보는 느닷없이 유다에게로 달려갑니다. 넷째 아들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이 파격을,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은 왜 밀려났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함으로써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건에서 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법정이었다면 이쯤에서 재판이 열렸을 것입니다. 누가 적합한가, 누가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유다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족보에 기록된 그의 행적은 당혹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정확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다의 이름 위에 당신의 손을 얹으셨습니다. 서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자격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한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형은 부지런하고 영리하여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번듯한 집을 짓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동생은 그에 비해 변변치 않았습니다. 늘 어렵게 살았고,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았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형이 축복받은 인생이고, 동생은 저주받은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자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일찍이 왕을 배출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왕이 없을 때, 에돔 땅에는 이미 왕들이 줄지어 섰습니다(창세기 36장). 세상적 기준으로만 보면 에서의 가문이 야곱의 가문보다 훨씬 '성공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세상적 번영의 총량이 아닙니다. 축복은 약속의 계보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계보가 어느 집안을 통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족보는 두 갈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번영하지만 약속이 없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굴곡지고 수치스럽지만 그 안에 약속이 흐르는 길입니다. 에서는 전자요, 야곱 그리고 유다는 후자입니다. 하나님은 후자의 길 위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십니다.
이제 우리는 족보 속에서 가장 불편한 이야기 앞에 섭니다. 유다와 다말의 사건입니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남 엘은 다말과 결혼했으나 악하여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둘째 오난이 형수 다말을 아내로 맞아 형의 대를 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난 역시 이기적인 행동으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두려웠습니다. 다말 때문에 아들들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면 다말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속으로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사실상 약속을 저버린 것입니다.
유다의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내 아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가장의 의무다." 얼마나 인간적인 생각입니까? 아버지라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과부로 친정에 앉아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마음 안에는 하나의 간절함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약속의 자손을 낳아야 한다. 나는 이 계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거룩한 집착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통해 아이를 잉태합니다. 사건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다말을 정죄했습니다. 유다도 처음에는 그녀를 불태워 죽이라 명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의 도장과 지팡이와 끈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것들의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노라."
그 순간, 유다의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한 마디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자기 부인의 고백 중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자신의 두려움이, 자신의 계획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사건 앞에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틀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려 했던 저 여인이 옳았다."
어느 젊은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정이 넘쳤고, 비전이 선명했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분란이 일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오해가 쌓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으며, 몇 년간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해 이 일을 했는데, 왜 이렇게 됩니까?"
오랜 침묵 끝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음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방식으로, 내 이름으로, 내 영광을 위해 했구나.' 그 사역자는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옳으십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그날 이후 그의 사역은 달라졌습니다. 외적으로 더 화려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작아지고, 더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전에 없던 깊이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은 우리가 잘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셔서 우리의 자기 중심성이 드러나고, 우리가 "나는 틀렸고 주님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현장입니다. 평탄한 길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칠고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길에서,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며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역대상 2장 7절에는 아간의 이름이 슬며시 끼어 있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라." 짧은 한 줄이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아간은 여리고 전투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물건을 탐하여 몰래 숨겼습니다.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서른여섯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한 사람이 공동체 전체를 고통 속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개인이기 이전에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의 죄가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원리가 복음의 심장이기도 합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고통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의로움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 전체의 의로움이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모든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다면, 예수 한 분의 순종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가져옵니다(로마서 5:19). 이것이 약속의 공동체 원리입니다.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 족보 안에 흐르는 것은 바로 이 원리입니다.
다말을 통해 태어난 쌍둥이는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이 부끄러운 사건에서 태어난 베레스의 계보가 훗날 다윗으로 이어지고, 다윗의 계보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집니다(마태복음 1:3). 족보의 수치가 영광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수치와 실패가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유다의 수치도, 다말의 절박함도, 아간의 범죄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재료가 됩니다.
성도의 인생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 탄식하기보다, 그 고난과 간섭을 통해 나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 계획이 무너지고, 내 논리가 틀렸음이 드러나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는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주님, 당신이 옳으십니까?" 그리고 그 고백의 자리에서 비로소 은혜의 문이 열립니다.
족보 속의 수치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로움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우리의 인생 족보 안에서, 우리가 가장 부끄럽다고 여기는 그 장들을 통해서도 말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고백이 시작되는 곳에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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