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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역대상 - 에서의 족보, 하나님의 간섭이 은혜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0.

"에서의 아들은 엘리바스와 르우엘과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요. 엘리바스의 아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비와 가담과 그나스와 딤나와 아말렉이요. 르우엘의 아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밋사요. 세일의 아들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요. 로단의 아들은 호리와 호맘이요 로단의 누이는 딤나요. 소발의 아들은 알랸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비와 오남이요 시브온의 아들은 아야와 아나요. 아나의 아들은 디손이요 디손의 아들은 하므란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에셀의 아들은 빌한과 사아완과 야아간이요 디산의 아들은 우스와 아란이더라."(역대상 1:35~42)

어떤 삶이 복받은 삶일까요?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원하는 것들이 때맞춰 이루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반대로 자꾸 막히고, 아프고,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은 저주받은 삶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상식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뒤집습니다. 역대상 1장 35절부터 42절까지, 성경에서 가장 무심하게 기록된 것처럼 보이는 에서의 족보 속에 그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두 아이는 아직 세상 빛도 보지 못했습니다.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내가 사랑하고,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 (로마서 9:13)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공정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 '미움'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잘해주는 것, 미움은 나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은 잘 살고, 미움받는 사람은 고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에서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습니다.

에서는 힘이 셌습니다. 사냥을 잘했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방 여인들과 자유롭게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족장이 되었으며, 에돔이라는 나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그의 족보는 놀랍도록 풍성합니다. 아들들의 이름, 손자들의 이름, 족장들의 이름이 줄지어 나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형을 속이고, 도망 다니고, 외삼촌 라반에게 이십 년을 착취당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일찍 잃고, 아들 요셉을 잃었다고 믿으며 긴 세월을 슬픔 속에 살았습니다. 야곱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때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세기 47:9)험악한 세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역대상 1장의 에서 족보를 천천히 읽다 보면 묘한 느낌이 듭니다. 이름들이 줄지어 나옵니다. 엘리바스, 르우엘, 여우스, 얄람, 고라... 그런데 그것뿐입니다. 아무 사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기록도 없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구절도 없습니다. 고난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저 낳고, 낳고, 낳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벧엘에서 꿈속에 나타나셨고, 얍복 강가에서는 직접 씨름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면 야곱을 그냥 넘어뜨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자기 확신, 자기 능력,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만을 무너뜨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세기 32:26) 자기 힘으로 버티던 사람이,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에서에게는 이런 장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기록이 없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 책망하시거나 가로막으셨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고,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두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미움'의 실체였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메시지는 낯선 방식으로 와닿습니다. 한 남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능력 있고 성실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을 얻었고, 멋진 집을 마련했습니다. 뭔가를 원하면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신앙 생활도 했지만 사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노력으로 되었으니까요. 기도는 형식이었고, 예배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늘 잘 나갔고, 크게 실패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깊은 공허함을 느낍니다. 가진 것은 많은데, 무언가 근본적으로 불안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할 것 같고, 지금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자녀들이 자기만큼 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고, 옆 사람이 자기보다 잘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불편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종종 올라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이 떠오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창세기 27:40) 에서의 저주는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칼을 쥐어야만 안심이 되는 삶, 힘이 곧 자기 존재 이유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불안해지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삶,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삶의 열매입니다.

반면 야곱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형을 속인 죄의 결과로 도망쳐야 했고, 자신도 속임을 당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자리마다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도망자 신세로 돌을 베고 누웠을 때 하늘 문이 열렸고, 강가에서 절망했을 때 하나님이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야곱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험악하다고 느꼈던 그 세월 속에 하나님의 손이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였습니다. 공부도 싫어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기도했고, 때로는 눈물로 아들을 붙잡았습니다. 아들은 그 간섭이 싫었습니다. 자유롭게 놔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놓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아들이 실패할 때마다 곁에 있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수십 년이 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간섭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돌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반면 이웃집 아이는 달랐습니다. 부모는 바빴고 아이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였고,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찌르실 때, 그 말씀이 아프게 느껴질 때, 원하던 것이 막혀버릴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눈여겨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브리서 12:6) 채찍이 없는 곳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에서의 족보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족보의 비극입니다. 당신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십니까? 요즘 당신의 삶에 하나님의 간섭이 느껴지십니까. 말씀이 마음을 불편하게 찌릅니까. 기도할 때 응답 대신 침묵이 들립니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억울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저주의 증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에서를, 즉 자기 힘을 믿고 칼을 쥐고 살려는 본성을 무너뜨리고 계신 것일 수 있습니다.

야곱이 환도뼈를 다쳐 절뚝거리며 걸어나올 때, 그는 전보다 훨씬 약해진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진정 강해졌습니다.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 위에 서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족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느냐고. 자기 능력으로, 자기 판단으로, 자기 계획으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냐고. 그 삶이 겉으로는 성공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의 흔적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에서의 족보와 같은 삶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반면 야곱의 삶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실패의 자리에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그 고백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진짜 복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에서처럼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했던 그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아프고 깊은 간섭이었습니다. 그 보혈 앞에 서는 것, 내 힘을 내려놓고 오직 긍휼을 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참된 시작이며 참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