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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

역대상 - 족보 속에 숨겨진 비밀, 하나님이 쓰신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

"헤스론이 낳은 아들은 여라므엘과 람과 글루배라.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으니 나손은 유다 자손의 방백이며, 나손은 살마를 낳고 살마는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로 아비나답과 셋째로 시므아와, 넷째로 느다넬과 다섯째로 랏대와,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 그들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요.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으니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었더라."(역대상 2:9~17)

오래된 족보를 펼쳐 보면, 처음에는 그저 낯선 이름들의 나열처럼 느껴집니다.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고, 그가 또 아무개를 낳고, 반복되는 이름들 사이에서 우리는 쉽게 지루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는 다릅니다. 거기에는 이름 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 하나님의 방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역대상 2장에 기록된 유다 가문의 족보가 바로 그런 족보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메시아의 혈통이 흘러가야 할 가문이었고, 이스라엘의 왕권이 약속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문이 하마터면 끊어질 뻔했습니다. 유다의 맏아들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죽임을 당했고, 둘째 오난도 그 죄로 죽었습니다. 유다의 아들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가운데, 며느리 다말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건만, 유다는 다말에게 그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두려움이 유다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다말은 과부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살아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이야기는 사실상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말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가는 길목에 앉았습니다. 유다는 그녀를 창기로 오해하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훗날 다말의 임신이 알려지자 유다는
"그녀를 불사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내민 것은 유다 자신의 도장과 지팡이였습니다. 유다는 말했습니다. "그녀가 나보다 옳도다." 그렇게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습니다. 끊어질 뻔했던 유다의 가문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깔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옵니다. 베들레헴의 엘리멜렉 가문은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했다가 남자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고,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오르바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달랐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룻 1:16)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었습니다. 율법적으로 따지면, 모압 자손은 열 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신 23:3)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메시아의 조상이 된 다윗의 족보에 모압 여인 룻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설계한 이야기라면 이렇게 쓰지 않습니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정통성을 강조하고, 흠 없는 가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 여인을 통해, 법적 경계 밖에 있던 사람을 통해, 그 족보를 이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오해에 직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일종의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을 "나는 어떤 내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마치 믿음이란 훈련하면 강해지고, 소홀히 하면 약해지는 근육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배를 빠지면 믿음이 줄어드는 것 같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믿음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행실이 얼마나 훌륭한가에 따라 흔들립니다.

그러나 다말과 룻의 이야기는 그런 이해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다말은 율법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가문을 이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혈통적으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랑할 만한 공로도, 내세울 만한 정통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그 역사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성도 됨은 인간의 자격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한 의사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평생 스스로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가 믿었던 것이 사실은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의 함정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에 빠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격렬하게 경고했습니다. 그 다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를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성도는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기적의 산물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 연결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기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봄이 되면 앙상했던 나무에 새잎이 돋아납니다. 나무가 겨우내 열심히 노력해서 잎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뿌리로부터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십니다.

역대상 2장에서 우리는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다말을 발견하고, 룻을 발견합니다. 흠 없이 정통한 사람들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왔음을 봅니다. 그 족보의 끝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족보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은혜로, 공로를 쌓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믿음조차 우리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성도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 안으로 편입된 사람입니다. 끊어질 뻔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손이 닿아 새롭게 이어진 생명입니다. 다말처럼, 룻처럼, 우리 역시 인간의 계획 밖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더 잘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경건해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가 성도의 삶이고,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이 쓰시는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족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쓰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