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바임의 아들은 이시요 이시의 아들은 세산이요 세산의 아들은 알래요. 삼매의 아우 야다의 아들들은 예델과 요나단이라 예델은 아들이 없이 죽었고, 요나단의 아들들은 벨렛과 사사라 여라므엘의 자손은 이러하며, 세산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라 그에게 야르하라 하는 애굽 종이 있으므로, 세산이 딸을 그 종 야르하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더니 그가 그로 말미암아 앗대를 낳고, 앗대는 나단을 낳고 나단은 사밧을 낳고, 사밧은 에블랄을 낳고 에블랄은 오벳을 낳고, 오벳은 예후를 낳고 예후는 아사랴를 낳고, 아사랴는 헬레스를 낳고 헬레스는 엘르아사를 낳고, 엘르아사는 시스매를 낳고 시스매는 살룸을 낳고, 살룸은 여가먀를 낳고 여가먀는 엘리사마를 낳았더라."(역대상 2:31~41)
비 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작은 시골 마을에 오래된 사진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은 연세가 많은 노인이었는데, 가게 한쪽 벽에는 사람들이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낡은 사진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은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고, 어떤 것은 물에 젖어 번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날 한 청년이 사진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벽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속 가족은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 얼굴에 상처가 있는 형, 울고 있는 어린아이…. 누가 봐도 자랑하고 싶은 가족사진은 아니었습니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이런 사진은 왜 아직도 버리지 않으세요?”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족이거든.”
그 말은 마치 역대상에 기록된 유다 족보를 설명하는 말 같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족보라고 하면 훌륭한 가문을 떠올립니다.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나오고, 자랑할 만한 조상들이 줄지어 있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 유다 족보는 이상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무 지저분합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하나님 백성이 아닌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산은 아들이 없자 애굽 종 야르하를 사위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합니다. 이 족보를 읽다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의 자랑거리를 다 무너뜨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하필 이런 사람들인가?” 우리는 묻게 됩니다. 조금 더 깨끗한 이야기로 꾸밀 수는 없었을까? 조금 더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사람들로 메시아의 족보를 채울 수는 없었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믿음 좋은 사람처럼 인정받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는 그래도 괜찮은 신자야”라는 생각을 붙들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 족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혈통도 없고, 완전한 의로움도 없고, 내세울 만한 거룩함도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래된 양탄자 같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뒤집어 보면 실밥이 엉켜 있고 먼지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 뒤집힌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게 바로 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런 인생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포로들을 “좋은 무화과”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해서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헛된 자랑을 무너뜨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형통하고, 자녀가 잘되고, 문제가 해결되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돌보심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십니다. 붙잡고 있던 꿈이 깨지게 하시고, 사람에게 실망하게 하시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절망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 의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손에 쥐어진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 하나만 남기십니다. “이것 외에는 네 소망이 없단다.” 그 음성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평생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고, 남들에게 인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사업이 무너지고 자녀 문제까지 겹치면서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예배 후 텅 빈 본당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된 삶을 사랑했구나.” 그날 그 집사님은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야 십자가가 보입니다. 이제야 은혜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자신의 믿음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죄인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일부러 너덜너덜하게 만드시는지도 모릅니다. 유다 족보처럼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족보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완벽한 사람들의 계보가 아니라, 실패자와 죄인과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이기도 합니다. 혹시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십니까? 남들에게 말 못 할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여전히 엉망인 자신 때문에 낙심하십니까? 그렇다면 유다 족보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처음부터 깨끗한 사람들만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깨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붙드시고, 그들의 실패 위에 은혜를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감사가 됩니다. “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섭니다. 너덜너덜한 인생을 들고서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역대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역대상 - 가장 작은 곳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 (0) | 2026.05.09 |
|---|---|
| 역대상 - 족보 속에 숨겨진 비밀, 하나님이 쓰신 이야기 (0) | 2026.05.02 |
| 역대상 - 족보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문법, 유다와 다말 (0) | 2026.04.20 |
| 역대상 - 에돔의 왕들과 진정한 통치자에 대하여 (0) | 2026.03.20 |
| 역대상 - 에서의 족보, 하나님의 간섭이 은혜다 (0) | 2026.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