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하난은 아사랴를 낳았으니 이 아사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자이며, 아사랴는 아마랴를 낳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고 사독은 살룸을 낳고, 살룸은 힐기야를 낳고 힐기야는 아사랴를 낳고, 아사랴는 스라야를 낳고 스라야는 여호사닥을 낳았으며,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역대상 6장 10~15)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던 날을 상상해 봅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전에 불을 지르고, 다윗의 궁전을 허물고, 남은 백성들을 사슬에 묶어 천 리 길을 걷게 했습니다. 그날 걷던 사람들 중에는 어제까지 밭을 갈던 농부도 있었고, 성전에서 제사를 돕던 레위인도 있었고, 왕궁에서 일하던 관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도, 땅도, 재산도, 심지어 예배드릴 성전마저 잃었습니다. 손에 쥔 것이라곤 몸에 걸친 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렬 속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사닥이었습니다. 역대상 6장의 길고 긴 족보인 그핫에서 아론으로, 아론에서 대대손손 이어져 온 제사장 가문의 이름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이 한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사로잡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함께 사로잡혀 갔더라." 이 짧은 한 구절이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왜 제사장이 필요 없는 곳에 제사장을 보내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바벨론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제단도 없고, 번제도 없고, 속죄제를 드릴 곳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대제사장을 그 백성과 함께 끌려가게 하셨을까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큰 병원에서 화재가 나서 환자들을 급히 다른 건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합시다. 장비도, 약품도, 수술실도 없는 임시 대피소로 환자들을 옮기는데, 그 담당 의사가 짐 하나 챙기지 못한 채 환자들과 함께 그 대피소로 따라갑니다. 의사가 그곳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치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에게는 그 의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들의 의사다." 이것이 바로 여호사닥이 바벨론으로 함께 끌려간 사건이 말하는 바입니다.
여호사닥은 바벨론에서 설교 한 편 남기지 않았습니다. 기적도, 사역도, 눈에 띄는 어떤 활동도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 백성 사이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선언, 하나님의 사랑이 폐허와 사슬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 백성을 떠나지 않았다는 선언 말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종종 오해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대단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자랑할 만한 능력을 갖추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백성 각자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중심이 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어느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쳐서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무너지고 집도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해봅시다. 자녀들이 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재산이 남아서가 아니라 부모가 여전히 자신들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부모가 함께 있다면 그 가정은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터전을 잃었고, 성전도, 왕도,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중심 되는 대제사장이 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 잃어도 중심이 살아 있으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은 우리에게 이 여호사닥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진짜 실체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몸을 완전한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행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내 문제가 풀릴 것이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호사닥이 바벨론에서 아무 사역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동행은 나의 문제 해결이나 소원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 동행이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내 사랑에서 결코 끊어내지 않는다."
어떤 성도는 사업이 망하고, 병을 얻고, 자녀 문제로 밤잠을 못 이룹니다. 그런 상황에서 "왜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동행의 확증입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끌려가던 백성에게 여호사닥이 준 것이 사역의 결과물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였듯이,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것도 상황의 즉각적 해결이 아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그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신앙생활의 가장 흔한 오해를 짚어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중심이 되려 합니다. 자기의 신앙 경력, 자기의 봉사, 자기 교회의 성장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훈장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빈부귀천이 다 잘려나갑니다. 평생 헌금을 많이 한 사람도, 평생 교회 문턱을 밟아본 적 없는 사람도, 십자가 앞에서는 똑같이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하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마치 큰 수술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는 그 사람이 사장이든 노숙자든 똑같이 마취되어 벌거벗은 몸으로 눕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그 어떤 이력도, 재산도, 지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살려주실 손길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도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맺은 생명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그 한 알의 밀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잘남이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그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역대상 6장의 긴 족보는 얼핏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름들의 나열입니다. 그러나 그 족보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폐허와 포로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폐허의 자리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은 아무리 모든 것을 잃어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끌려가도, 결코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건강을 잃고, 관계가 깨지고, 애써 쌓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상황의 반전이 아니라 동행의 사실입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는 그 사실 말입니다.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걷고 계신 그분이 계시기에, 나는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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