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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토기장이의 손 안에서, 셀라 자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5.

"유다의 아들 셀라의 자손은 레가의 아버지 에르와 마레사의 아버지 라아다와 세마포 짜는 자의 집 곧 아스베야의 집 종족과, 또 요김과 고세바 사람들과 요아스와 모압을 다스리던 사랍과 야수비네헴이니 이는 다 옛 기록에 의존한 것이라. 이 모든 사람은 토기장이가 되어 수풀과 산울 가운데에 거주하는 자로서 거기서 왕과 함께 거주하면서 왕의 일을 하였더라."(역대상 4:21~23)

어느 마을에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십일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 떳떳한 성도가 된 걸까?" 그리고 곧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만약 내일 내가 실수하고, 화를 내고, 죄를 짓는다면, 나는 다시 성도가 아닌 게 되는 걸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됨의 기준을 자신의 행실과 열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잘하면 안심하고, 못하면 자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 나은 의'는 인간이 더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도덕적 성취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당대 최고의 종교적 열심과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보다 더 나은 의란, 인간의 범주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의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완전한 의입니다.

여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마음이 더럽고 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존재입니다. 성도란 그 더러운 마음 위에 인간의 선한 가능성을 조금씩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의 의를 덧입혀 주신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창조의 첫 순간처럼, 우리의 성도됨도 우리 안에 있던 무언가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밖에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역대상 4장은 언뜻 보면 지루한 족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23절 사이, 유다의 아들 셀라의 자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왕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전쟁 영웅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토기장이가 되어 왕과 함께 거하며 왕의 일을 하였느니라." 이 짧은 구절 안에 성도의 사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명이라 하면 대단한 종교적 업적을 떠올립니다. 몇 명을 전도했는지, 몇 명을 선교지로 보냈는지, 얼마나 눈에 띄는 헌신을 했는지를 기준 삼아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는 왜 이렇게 열매가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성도일까."

그러나 셀라 자손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그릇을 빚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
왕과 함께 거하며 왕의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들의 작업이 얼마나 대단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누구와 함께 있었고 누구의 일을 했느냐입니다.

한 도예공방의 이야기입니다. 왕궁에 소속된 도공은 자기 취향대로 그릇을 빚지 않습니다. 그는 왕이 원하는 그릇, 왕의 식탁에 오를 그릇, 왕의 마음에 합한 그릇을 빚습니다. 자신의 예술적 만족이 목적이 아니라, 왕을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도의 사명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 스스로 뿌듯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내 힘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증거하는 도구로 사는 것이 참된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
내가 보기에 선한 행동'으로 규정합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스스로 목록을 만들고 스스로 채점합니다. 하지만 토기장이의 비유로 돌아가서, 토기장이가 왕에게 소속되어 있다면, 그가 만들 그릇의 기준은 자기 마음이 아니라 왕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릇이라도, 왕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왕의 일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일은 내가 스스로 정의한 선행 목록을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 곳을 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얼마나 종교적으로 열심이었는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완성된 사랑과 용서를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열심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여기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기차역에서 표를 사기 위해 평생 줄을 서서 애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선행과 자격을 증명해야 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
당신은 이미 그 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표는 이미 오래전, 다른 분이 대신 값을 치르고 당신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실상입니다. 성도는 구원열차에 타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미 그 열차 안에 태워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차 안에 탄 후에도 우리는 종종 창밖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
오늘 내가 화를 냈는데, 열차가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을까." "이번 주에 내가 실수했는데, 혹시 열차에서 내려지지는 않았을까." 이런 찜찜함과 의심은 결국 나 중심의 시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열차 안에서 승객이 화를 내거나, 졸거나,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해서 기차의 목적지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기관사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열차의 진로는 승객의 컨디션이 아니라 기관사의 결정과 이미 놓인 선로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흔들림이 아니라, 나를 그 열차에 태우신 분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플 때와 건강할 때, 울 때와 웃을 때. 우리는 흔히 좋은 환경을 '좋은 때'로, 나쁜 환경을 '나쁜 때'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진짜 중요한 '때'는 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열차에 올라 예수 안에 소속되어 있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병상에 누운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몸은 아프고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내 몸의 상태가 내 신앙의 좌표는 아닙니다. 나는 이미 예수 안에 있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육신의 고난이 성도의 소속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구원과 용서만이 우리가 붙들 힘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 더럽고 의라고는 없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구원열차에 태우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의입니다. 신자는 이제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의 평가에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셀라 자손처럼 이름 없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화려한 업적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왕과 함께 거하며, 왕의 마음에 합한 그릇으로 빚어져,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용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됨은 우리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그 손을 신뢰하며,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