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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야베스의 기도, 좁은 마음이 넓어지는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6.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훌과 소발이라. 소발의 아들 르아야는 야핫을 낳고 야핫은 아후매와 라핫을 낳았으니 이는 소라 사람의 종족이며, 에담 조상의 자손들은 이스르엘과 이스마와 잇바스와 그들의 매제 하술렐보니와, 그돌의 아버지 브누엘과 후사의 아버지 에셀이니 이는 다 베들레헴의 아버지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소생이며, 드고아의 아버지 아스훌의 두 아내는 헬라와 나아라라. 나아라는 그에게 아훗삼과 헤벨과 데므니와 하아하스다리를 낳아 주었으니 이는 나아라의 소생이요. 헬라의 아들들은 세렛과 이소할과 에드난이며, 고스는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종족들을 낳았으며,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10)

고려 말,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시조 한 수를 읊었습니다.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습니다. 충절이냐 배신이냐, 그것은 '어떠하리'로 넘길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비슷한 태도가 있습니다. "
어떻게 해석하든, 예수 믿고 천국 가면 그만 아닌가요?" 이 말은 얼핏 관대하고 넉넉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여가'식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가르는 책이며, 그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슬며시 빼내고 그 자리에 인간의 욕망을 채워 넣는 해석이 바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두 사람의 농사는 모두 망했습니다. 첫 번째 농부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
하나님, 이 비를 내려주시면 제가 십일조도 드리고 봉사도 하겠습니다. 제발 이 고난만 거두어 주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은 오직 가뭄을 해결해 줄 수단이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제거였고, 하나님은 그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두 번째 농부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
주님, 저는 이 가뭄이 오기 전까지 비 한 방울도 당신의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땅이 마르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얼마나 교만하게 살아왔는지 보입니다." 그는 가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은혜 위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길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악인의 길은 환란이 없기를 바라고, 환란이 오면 오직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환란 속에서 자신의 교만과 죄를 발견하고, 다시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의인이 환란에서 얻는 구원은 고난의 제거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얻는 자기 발견과 은혜의 재발견입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교회에 한 권의 책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였습니다. 성도들은 역대상 4장의 짧은 구절을 날마다 암송했고, 교회마다 이 기도가 울려 퍼졌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고 나의 지역을 넓히시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역대상 4:10)

그런데 이 기도가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용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교회 주차장 부지를 넓혀달라"는 당회의 기도가 되었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달라"는 개인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부동산 계약서를 들고 나와 야베스의 기도를 함께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의 욕망 실현을 위한 주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복주의입니다. 기독교를 '복을 구하는 종교'로 만드는 것, 십자가를 지우고 그 자리에 욕망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역대기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1장부터 9장은 거의 이름만 나열된 지루한 족보입니다. 아담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이어지는 긴 이름들의 행렬입니다. 그런데 4장 9~10절, 족보 한가운데 갑자기 야베스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왜 역대기 기자는 이 자리에 야베스의 기도를 끼워 넣었을까요? 역대기가 쓰인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책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은 불탔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으며, 그들은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하나님의 허락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백성들에게 야베스의 이야기는 단순한 복 받는 공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였습니다. "
지역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우리를 심판의 땅 바벨론에서 은혜의 땅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달라"는 간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히브리어의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단어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심판의 홍수 앞에서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듯이, 야베스의 기도도 바로 그런 구원의 맥락에서 응답된 것입니다.
"지역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더 많은 땅을 달라는 부동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영역 밖으로 나를 건져달라는, 은혜의 세계 안으로 나를 들여달라는 간구였습니다.

한 노인이 젊은 시절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는 사업에 성공했고, 건강하게 살았으며, 자녀들도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습니다. 오른손이 마비되었고, 말이 어눌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숨을 쉬는 것,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허락하신 은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걷는 한 발짝도, 우리의 건강도, 삶의 모든 영역이 애초에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
네가 내 은혜 없이 산 적이 있었느냐"를 가르치기 위해서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환란은 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누리고 있던 은혜를 다시 보게 하는 하나님의 교육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구해야 할 진정한 '
지역의 확장'은 무엇일까요? 성도가 거해야 할 진짜 땅은 강남의 아파트도, 교회의 주차장 부지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걱정과 불안, 타인에 대한 미움과 비교의식,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좁아져 있습니까? 그 좁고 어두운 마음이 바로 우리가 갇혀 있는 '바벨론'입니다.

"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바로 이 좁은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넓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안이 아니라 평안으로, 원망이 아니라 감사로, 욕망이 아니라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이 성도가 구해야 할 진정한 지경의 확장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장처럼, 애원해도 묵묵부답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침묵 안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우리를 은혜의 세계로, 그리스도 안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복을 조르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땅에서 은혜의 땅으로 건져달라는, 내 욕망의 지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지경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를 방주 안으로 들이신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끄시며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