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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지도에 없는 이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2.

"시므온의 아들들은 느무엘과 야민과 야립과 세라와 사울이요. 사울의 아들은 살룸이요 그의 아들은 밉삼이요 그의 아들은 미스마요. 미스마의 아들은 함무엘이요 그의 아들은 삭굴이요 그의 아들은 시므이라. 시므이에게는 아들 열여섯과 딸 여섯이 있으나 그의 형제에게는 자녀가 몇이 못되니 그들의 온 종족이 유다 자손처럼 번성하지 못하였더라. 시므온 자손이 거주한 곳은 브엘세바와 몰라다와 하살수알과, 빌하와 에셈과 돌랏과, 브두엘과 호르마와 시글락과, 벧말가봇과 하살수심과 벧비리와 사아라임이니 다윗 왕 때까지 이 모든 성읍이 그들에게 속하였으며"(대상 4:24~31)

어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세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가 정해준 몫의 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에게는 이상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
너에게는 따로 줄 땅이 없다. 대신 네 형의 땅 안에서, 형이 내어주는 만큼 거하여라." 셋째 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억울했을 겁니다. 나는 왜 독립된 몫이 없는가, 나는 왜 형의 그늘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나면 셋째 아들은 억울해할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은혜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역대상 4장, 시므온 지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신을 찾는 데는 대개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기를, 내 사업이 잘되기를, 내 가정에 평안이 임하기를 바라며 손을 모읍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부릅니다. 종교는 언제나 나를 중심에 두고, 신은 그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소비됩니다.

그런데 십계명에서 하나님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숨겨진 선언이 있습니다. "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개인 과외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로 묶인 관계, 즉 공동체적 관계입니다.

어느 성도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저는 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옆 사람이 죄를 짓든, 믿음이 흔들리든 그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라고요." 언뜻 겸손한 태도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와 구원의 개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죄와 구원은 개인의 성적표가 아니라, 한 몸이 함께 짊어지고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는 "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흔히 "오늘 걱정만으로도 충분히 힘드니 내일 걱정까지 하지 말자"는 뜻으로 읽습니다. 나에게 충분하고, 나에게 만족스럽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뒤집어 읽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그날의 괴로움이 '나'에게 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족하고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내가 겪는 어려움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재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나는 내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마치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듯이, 성도는 자기 사정 해결을 위한 이방인의 기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었을 때,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 동편의 땅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가축을 기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요청했습니다. "
우리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강을 건너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나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 오해했고, 결국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의 땅,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 풍요가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앗수르가 침공했을 때, 이 두 지파 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사라졌습니다.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습니다. 마치 회사를 세우면서 "
저는 본사 정식 직원은 안 하고 그냥 하청으로 일할게요"라고 했던 사람이, 정작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가장 먼저 계약이 끊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 됨을 거부한 자리에는 보호막도 없었습니다.

이제 셋째 아들의 이야기, 시므온 지파로 돌아갑니다. 시므온은 야곱의 아들이었지만, 그 이름에는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과거 여동생 디나의 일로 분노한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뒤, 그들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할 때 몰살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할례를, 복수의 무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야곱은 죽기 전 유언에서 시므온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
너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고 나뉘리라." 독립된 땅도, 온전한 유업도 없이 흩어지는 저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므온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얼굴을 발견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와 십자가를, 나의 유익과 복수와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원한을 정당화하고, 은혜를 받은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날카로운 칼을 휘두른 적이 없습니까? 시므온은 먼 조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4장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영토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의 경계 안에서 거주지를 얻었습니다. 유다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계보, 약속의 완성자가 속한 지파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시므온이, 심판받아 마땅한 자가, 유다에게 속함으로써 흩어짐의 저주 대신 보호막을 얻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저주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유다 안에 머묾으로써 유다의 울타리가 그를 감싸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첫째 아들처럼 당당하게 자기 몫을 받아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주받아 흩어져야 마땅한 시므온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참된 유다의 사자 안에 속함으로써 그분의 의와 승리를 거저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해서 받은 몫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기에 받은 몫입니다.

성도의 평안이란 걱정과 근심이 말끔히 사라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평안은, 내가 본래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깊이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용서했고, 지금 내가 약속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평안입니다.

셋째 아들은 처음엔 "
왜 나는 독립된 땅이 없는가"라며 억울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본래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자격조차 없던 존재였음을 깨닫는 순간, 형의 땅 안에 거하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
내가 믿는다"는 종교적 자부심을 내려놓으십시오. 나를 믿음의 자리로 이끄신 이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아니라, 우리를 유다의 품 안으로 데려가신 그 은혜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