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의 아들은 아비야요 그의 아들은 아사요 그의 아들은 여호사밧이요. 그의 아들은 요람이요 그의 아들은 아하시야요 그의 아들은 요아스요. 그의 아들은 아마샤요 그의 아들은 아사랴요 그의 아들은 요담이요. 그의 아들은 아하스요 그의 아들은 히스기야요 그의 아들은 므낫세요. 그의 아들은 아몬이요 그의 아들은 요시야이며"(역대상 3:10~14)
우리는 흔히 성경을 위인전처럼 읽습니다. 다윗의 용기, 솔로몬의 지혜, 바울의 헌신을 읽으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서점에는 다윗처럼 싸워라,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라는 제목의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위인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우리가 본받을 모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그릇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업적이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이십니다.
봄날, 왕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계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그는 궁궐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밧세바였습니다. 그녀는 전쟁터에 나간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권력으로 그녀를 불렀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윗은 치밀하게 은폐를 시도했습니다.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아내 곁에 머물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데 내가 어찌 집에서 편히 먹고 마시겠습니까"라며 자기 집 문 앞에서 잠을 잤습니다. 충직함이 오히려 다윗의 계획을 막은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세워두고, 너희는 물러나라." 한 충직한 신하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 명령이 담긴 편지를 직접 품에 안고 전쟁터로 걸어 들어가면서 말입니다. 이 사건을 읽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판결을 내립니다. '살인죄, 간음죄.'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정면으로 죄를 추궁하는 대신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왕이시여, 한 마을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하여 겨우 어린 암양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은 주인의 자식들과 함께 자라며 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잔에서 마시고 그의 품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 양 떼에서는 한 마리도 아까워서 내놓지 않고, 그 가난한 자의 어린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다윗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했습니다.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단 하나뿐인 것을 빼앗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정의감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나단의 비유는 정교한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신 다윗의 본질적인 죄는 살인이나 간음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죄, 바로 긍휼이 없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오직 하나뿐인 것을 가진 약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보신 다윗의 죄의 본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다윗은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밤새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신하들이 음식을 권해도 거절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났고, 아이는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도 말을 듣지 않으셨는데,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나.'
그런데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일어났습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성소에 나가 예배한 뒤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하여 물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울며 금식하시더니, 죽었다 하니 일어나 잡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다윗이 답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 금식하며 운 것은,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주실까 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내가 금식한들 다시 돌아오겠느냐." 이 대답 속에 다윗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억울해하거나 항변하지 않고 담담히 수용했습니다. 그것은 굴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움직이셨습니다. 밧세바가 두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은 그 아이를 솔로몬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 아이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여디디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이 이름이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솔로몬은 어떤 자리에서 태어났습니까? 다윗의 간음과 살인, 은폐와 비겁함, 심판과 죽음의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윗의 죄로 인해 남편을 잃은 여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아이에게는 어떤 자격도, 정당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이를 택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사랑의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계보는 솔로몬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의 수많은 다른 아들들을 제쳐두고, 하필 이 아이를 통해 계보를 이으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새겨두신 비밀입니다. 자격이 없는 곳에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심판이 내려진 그 자리에서 사랑이 싹틉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은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1944년, 독일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 코리 텐 붐과 그녀의 가족은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코리는 라벤스브뤽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잔인함을 목격했습니다. 언니 베치는 그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는 독일을 돌아다니며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뮌헨의 한 교회에서 강연을 마쳤을 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군중 속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왔습ㄴㄱ다. 라벤스브뤽의 간수였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전한 용서의 메시지,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을까요?"
코리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용서를 내 손을 통해 흘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전류 같은 것이 흘렀고, 눈물이 쏟아졌다." 코리 텐 붐 자신도, 그 간수도, 스스로의 자격으로는 그 화해의 자리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을 그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디디야'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두 맹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단순한 족보 호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 고백입니다. 다윗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 즉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져오신 분이 당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들이 구한 것도 자신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직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진짜 기적은 눈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긍휼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눈이 다시 멀어도,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 앞에 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일종의 자격 획득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예배를 빠지지 않고, 헌금을 성실히 드리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생긴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동기가 '나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은혜의 복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날마다, 더욱 철저하게 자신이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자신의 죄인 됨이 더 깊이 느껴져야 한다는 말이 역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은혜의 역설입니다. 빛이 밝을수록 그 빛 앞의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깊이 알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더 분명히 보입니다. 그 자리, 자신의 자격 없음이 철저히 드러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이 비로소 전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계보가 솔로몬으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새겨두신 복음의 서명입니다. 가장 자격 없는 자리에서, 심판이 지나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충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을 얻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의 주권적인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백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사랑밖에는 난 몰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하나님, 솔로몬의 하나님, 그리고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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