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과 셋째 시드기야와 넷째 살룸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여고냐, 그의 아들 시드기야요.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스알디엘과,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의 매제 슬로밋과,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하나냐의 아들은 블라댜와 여사야요 또 르바야의 아들 아르난의 아들들, 오바댜의 아들들, 스가냐의 아들들이니, 스가냐의 아들은 스마야요 스마야의 아들들은 핫두스와 이갈과 바리야와 느아랴와 사밧 여섯 사람이요. 느아랴의 아들은 에료에내와 히스기야와 아스리감 세 사람이요. 에료에내의 아들들은 호다위야와 엘리아십과 블라야와 악굽과 요하난과 들라야와 아나니 일곱 사람이더라."(역대상 3:15~24)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성경도 꽤 알았고, 기도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하나님을 믿어?" 청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친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랑이 뭔데?" 청년은 또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것',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내 삶이 잘 되게 해주시는 것'…… 그런 말들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왠지 부끄러워서 도로 삼켜졌습니다. 그 안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우리가 실제로 떠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시는 것, 취업이 되게 해주시는 것, 아프지 않게 해주시는 것,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몰래 끼워 넣고 있는 건 아닐까요?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올라탄 청년이 이어폰을 꽂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그것은 진심입니다. 그런데 만약 도움이 오지 않는다면? 취업이 계속 안 된다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훨씬 더 낯설고,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자를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알려면, 먼저 한 가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역대상 3장에는 기묘한 족보가 나옵니다. 유다 왕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이어지다가, 한 지점에서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 족보 한가운데에 새겨진 치욕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이, 마치 주민등록번호처럼 이름 옆에 새겨져 있습니다.
여고냐(여호야긴)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때 포로로 끌려간 왕입니다. 그의 선조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이 결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수백 명의 이방 여인들을 거느렸고, 그 여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위해 예루살렘 언덕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씁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여호와를 떠났더라." 지혜의 왕이, 가장 많이 받은 왕이, 결국 가장 깊이 타락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솔로몬이 그럴 수가 있지?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바로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SNS를 하다 보면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이 퍼질 때, 댓글란은 빠르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비난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는 저러지 않는다"는 확신이 비난의 연료가 됩니다.
솔로몬을 손가락질하는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며 혀를 차는 사람,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의입니다. '나는 다르다'는 뿌리 깊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그것이 인간을 망하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죄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보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이 더 깊은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두 나라로 나누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고, 에스겔 선지자 시대에 하나님은 환상 속에서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막대기 두 개를 가져다가 하나로 합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굳이 나누었다가 다시 합치실까요? 그것은 이전의 '하나 됨'이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혈통, 같은 왕 아래 있다는 정치적 결속, 같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종교적 습관, 그것들은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한 연합이었습니다. 진짜 하나 됨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하나 됨은 어디서 옵니까?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리에서 옵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 앞에서 "나는 너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바로 그 벽을 허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기도 많이 하는 집사와 주일에 겨우 오는 청년,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과 적게 내는 사람,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같습니다.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고, 똑같이 은혜로 살아난 자입니다.
예레미야서 24장에는 무화과 두 광주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환상이었습니다. 한 광주리에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가 담겨 있었습니다. 좋은 무화과가 누구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라니 말입니다. 나라를 지킨 사람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더 좋은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은 정반대였습니다. 끌려간 자들이 복이 있고, 남아 있는 자들, 애굽으로 도망친 자들은 나쁜 무화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로잡혀 간 자는 이제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 외에는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긍휼을 구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살아남은 자'라고 여깁니다. 내가 믿음이 있어서, 내가 잘 버텨서,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 안에는 자기 공로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아십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들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먹이를 먹어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것이 '사로잡혀 간 자'의 고백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 나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달려옵니다.
탕자의 형은 어땠습니까? 그는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지자, 그는 분노합니다. "나는 이렇게 일했는데, 나는 이렇게 충성했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은 자기 공로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벌어들인 임금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형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들입니다. 동생은 바벨론에 끌려간 자들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누가 기도를 더 오래 하는지, 누가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는지, 누가 헌금을 더 많이 드리는지, 그것들로 서로를 저울질하고, 그 저울로 담을 쌓습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열심히 믿는다." 그 마음이 형의 마음입니다. 남아 있는 자의 마음입니다.
반면,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려본 사람, 죄에 넘어져본 사람,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은 고백할 것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 고백이 진짜입니다. 사로잡혀 간다는 것은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를 복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내 공로가 사라진 자리에, 오직 은혜만 남습니다. 내 의가 무너진 자리에, 오직 그리스도만 서십니다.
역대상의 족보 속 그 짧은 구절,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초대입니다. 네가 망한 자리, 네가 포로 된 자리, 네가 더 이상 "나는 괜찮아"라고 말할 수 없는 자리로 내려오라는 초대입니다. 바로 거기서, 아버지가 달려오십니다. 자격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오직 자신이 자격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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