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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언약궤를 위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30.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이며, 게르손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립니와 시므이요.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라 그 조상에 따라 레위의 종족은 이러하니"(역대상 6:16~19)

어느 시골 교회에 오래된 강대상 하나가 있습니다. 나무 표면이 갈라지고 색이 바랜 그 강대상 정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
우리가 예수를 보고자 하나이다."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셨던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마다 성도들의 얼굴이 아니라 저 글귀를 먼저 보게 하려고 새겼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가 아니라, 성경이 누구를 증거하려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6장의 레위 족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비슷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까?

우리는 흔히 성경을 펼칠 때 이런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
오늘 나에게 무슨 위로를 주실까, 오늘 나의 삶에 어떤 지침을 주실까?"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위로와 지침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기록된 근본 목적은 아닙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신혼 초에 함께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요리책을 펴 놓고 레시피를 하나하나 따라 하며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내가 요리책을 보는 목적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
이 레시피대로 하면 좋은 음식이 나온다"는 책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나중에는 "내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이리저리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요리책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었고, 음식의 기준은 오직 그녀 자신의 기호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 해석도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
내 삶에 유익이 되는가, 내 마음이 기쁜가?"라는 잣대로만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고 나의 취향과 필요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읽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출발점을 놓치면 우리의 모든 해석은 아무리 은혜로워 보여도 결국 실패한 해석이 되고 맙니다.

역대상 6장을 자세히 보면 레위 사람들의 직무를 소개하면서 특별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세움을 받은 것은 "
언약궤가 평안히 있을 때에" 찬송하는 직무를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모든 계보와 직분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회사의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을 떠올려 보십시오. 신입사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
제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잘해서 회사가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의 시스템과 방향이 먼저 있고, 여러분은 거기에 맞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입사원의 노력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일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잡아 주는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언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성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가리고 방해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보여주는 진짜 그림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언약궤를 위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언약과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의 계보가 장황하게 나열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 가문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심의 기록입니다.

역대상 6장의 족보는 놀랍게도 바벨론 포로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성경은 제사장 여호사닥이 그 백성과 함께 사로잡혀 갔다고 기록합니다.

한 가정이 큰 화재로 집을 잃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가족들이 유일하게 챙겨 나온 것이 사진첩 한 권이었습니다. 그 사진첩은 집도, 재산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족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우리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이다." 포로기에 제사장이 백성과 동행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나라는 무너지고 성전은 불탔지만, 제사장이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제사장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자였고, 이 중보자의 자리는 훗날 참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참혹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로 지금도 하나님 앞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족보 가운데 사무엘의 이름이 등장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합니다. 보통의 족보라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기록되지만, 사무엘의 경우는 그 흐름이 조금 다르게 다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이 그저 엘가나 가문의 아들 중 하나가 아니라, 한나의 서원을 통해 태어난 "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낳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시다. "
이 아이는 제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는 그저 맡아 기르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성취나 대를 잇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인간적 혈통과 가문의 자랑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세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우리를 더 깊이 겸손하게 만드는 사실 하나를 덧붙입니다. 한나의 눈물 어린 기도로 태어난 그 사무엘조차, 그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불의를 행하는 사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냉정한 진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특정 가문이나 특정 인물의 뛰어남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 같은 위대한 선지자의 혈통조차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만이 흔들리지 않는 기초입니다.

한나는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고 나서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감사의 노래가 아닙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한 사람이 오랜 투병 끝에 회복되었을 때, 흔히 "
다시 건강해져서 감사하다"는 말로 끝날 법한데, 정작 그 사람이 병상에서 깨달은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진실이었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배운 것은 건강이 최고라는 게 아니라, 제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들을 얻은 기쁨을 넘어, 생사화복의 주권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 그것이 바로 한나가 다다른 자리였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성공, 손에 잡히는 육적 형통을 진짜 현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한나의 찬양은 그보다 더 깊은 현실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와 언약을 통해 이루시는 세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낮아짐에서 높아짐으로 옮기시는 그 나라야말로 참된 생명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랜 방황과 전쟁 끝에 마침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 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상자 하나를 옮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그 백성 가운데 온전히 자리 잡았다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방황 끝에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언약궤가 다윗성에 안착한 것처럼, 우리 신자들에게도 그런 안착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는 자리입니다.
신자의 참된 평안은 자신의 열심과 공로를 쌓아 올리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낮추고,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높이는 자리에 설 때 찾아옵니다. 언약궤가 방황을 멈추고 다윗성에 거했듯이, 우리의 마음도 자기 자랑과 자기 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