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멜은 말리의 아들이요 말리는 무시의 아들이요 무시는 므라리의 아들이요 므라리는 레위의 아들이며,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역대상 6:47~48)
어느 오래된 현악기 공방에 낡은 첼로 한 대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첼로였는데, 어느 날 한 노장 연주자가 그 첼로를 발견하고는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몸통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고, 줄도 낡아 있었습니다. 첼로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볼품없는가. 좋은 소리를 내려면 내 안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첼로가 아무리 스스로를 갈고닦아도, 혼자서는 단 한 음도 낼 수 없었습니다. 소리는 활을 든 연주자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연주자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낡고 흠집 난 첼로에서, 노장의 손끝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깊은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협력해서, 내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반반씩 어우러져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협력자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주자가 악기를 들듯 우리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역대상 6장에 등장하는 레위 사람들입니다.
역대상 6장 47~48절은 얼핏 보면 지루한 족보의 한 대목처럼 보입니다. 므라리 자손, 레위 자손의 이름들이 나열되고, 이어서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막의 모든 일을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구절 안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신인협력설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나는 그 은혜에 반응해서 선한 행동을 보태고, 그렇게 하나님과 내가 힘을 합쳐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훨씬 더 냉정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죄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가운데 오히려 내 안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일하심의 실제 출발점입니다.
목수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망치가 "내가 이 못을 박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망치는 그저 목수의 손에 들려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때로 목수는 그 망치로 못을 박기도 하지만, 낡고 녹슨 망치의 못난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뜻밖에 자신의 추악한 죄, 감추고 싶었던 연약함과 마주할 때, 그것을 실패라고만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라는 망치를 들어, 나의 본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갑자기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러나 요한복음 16장 7~11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첫 번째 일하심은 나를 갑자기 선한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죄로 알아보게 하시는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의 의로움, 나의 성실함, 나의 신앙적 노력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더러운 누더기 같은 것이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저주 아래 놓인 존재였는지를 깨닫는 그 순간, 비로소 십자가가 진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참된 찬송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참된 찬송은 아름다운 화성이나 세련된 악기 연주, 감동적인 가사가 아닙니다. 참된 찬송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주 아래 놓인 비천한 나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신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는 상태" 그 자체입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악보를 읽을 줄 몰라도,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 우는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레위 자손만 장막의 일을 맡았을까요? 역대상 6장은 왜 그렇게 길게 레위 지파의 족보를 나열하며 그들의 직무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그 답은 창세기 49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야곱은 죽기 전 열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뜻밖의 말을 남깁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세겜에서 저지른 잔혹한 폭력 때문에, 야곱은 이 두 아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주를 받을 것이요, 흩어지리라."
시므온 지파는 훗날 실제로 독자적인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 안에 흡수되어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같은 저주의 말씀 아래 있었지만, 레위 지파는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흩어짐'이 도리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레위 사람들은 땅도 없고, 자기 소유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성막과 제사를 섬기는 일에 매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저주로 시작된 흩어짐이,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역대상 6장이 그토록 정성스럽게 레위 자손의 족보를 기록해 놓은 이유입니다. 레위 사람만 장막 일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거룩하거나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레위 지파의 시작은 잔혹한 폭력과 저주의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저주받은,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전혀 없는 지파를 택하셔서 성막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단절된 존재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 사람이 제물의 피를 들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설 때마다, 이스라엘은 매번 이 사실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오직 피로만 나아갈 수 있다."
한국 교회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신의주와 평양을 중심으로 부흥했던 신앙의 뿌리들이 전쟁으로 인해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왔습니다.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저주와 다름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가족과 헤어지고 빈손으로 낯선 땅에 내던져진 그 시간을 누가 축복이라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흩어진 그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기도의 불씨를 지폈고, 그 흩어짐이 오늘 한국 교회 전역에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주처럼 보였던 흩어짐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도 그런 흔적이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겪은 상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실패,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시간들, 어쩌면 그것은 시므온과 레위처럼, 겉으로는 저주의 선언처럼 들렸던 순간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부서지고 낮아진 자리에서, 우리를 더 깊이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 자리가, 오히려 참된 예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길은 무언가 대단한 공로나 선행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애쓰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나의 무능함과 비천함, 나의 죄인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성도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첼로가 스스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려 발버둥 칠 필요가 없듯이, 우리도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우리를 손에 쥐신 그분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언덕 위로 올라가, 내가 쌓아온 모든 공로와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이 이루신 의와 용서만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라는 부족한 도구를 들어, 우리 안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가 십자가에서 값없이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셔서, 마침내 우리 입술에서 참된 찬송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그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하고 계십니다. 낡고 흠집 난 첼로에서 흘러나온 그 선율처럼, 우리의 연약함과 부서짐을 통해 흘러나오는 찬송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참된 찬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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